◆폴 혼 IBM 연구개발담당 최고경영자(CTO^수석부사장)
지난 한세기 동안 정보기술(IT)은 상상을 초월하는 발전을 거듭했다. 만약 1900년에 살던 사람에게 랩톱 컴퓨터를 보여준다면 무엇에 쓰는 기계인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아직은 그동안 성취한 기술발전에 도취할 때가 아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기 때문이다.
IT업계가 지금까지 컴퓨팅의 기술개발에 적용해온 접근방법은 놀랍게도 150여년 전에 찰스 배비지가 머리 속에 그렸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구상했던 ‘분석 엔진’은 입력(인풋)을 받아 산술적으로 계산해 출력(아웃풋)을 내는 것으로 오늘날 컴퓨터 메모리와 비슷하다.
더 구체적으로 그동안 우리가 약속해왔고 지향했던 바가 무엇이었나를 살펴보자. 먼저 IT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굉장한 기술이어야 했다. 까다로운 과학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사업경영과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자동화해줬어야 한다. 또 회사경영에 필요한 지식의 수집과 공유 및 생성까지 완전하게 지원해줘야 하며 완벽한 수준의 협업과 팀워크를 가능하게 해줘야 했다. 그러나 이같은 기대는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각종 정보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고 수시로 겪는 시스템 장애로 골치 아파하고 있다. 컴퓨터는 여전히 사용하기 어렵고 IT네트워크를 관리하는 일은 모니터링, 통합, 보안, 그리고 서로 다른 형태의 스토리지를 관리하는 악몽과 흡사할 정도다.
또 우리가 흔히 ‘자연언어 인터페이스’라고 부르는 기술조차 아직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이뤄온 ‘컴퓨팅’은 여전히 기계 중심적이며 출력 및 입력, 그리고 시스템 유지보수 등 모두 작업에서 사람이 개입해 판단하고 철저하게 관리해야 가능해진다.
이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과 현재까지 IT가 진화해온 방식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현재까지의 IT는 그 복잡한 특성으로 인해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네트워크의 모든 부문에 걸쳐 적지 않은 인간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만 막상 우리는 골치 아픈 것은 몰라도 되고 사람 손이 안가도 되는 인간중심의 전산환경을 원하고 있다.
이같은 인간중심의 접근법에 가장 좋은 예는 매우 복잡한 시스템으로 구성된 인체다. 심장박동, 호흡, 혈관 및 동공의 수축과 이완, 소화기관 및 체온조절 기능은 의식적인 통제 없이 자율신경계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사람은 복잡다단한 인체내의 생물학적인 요소는 자율신경계에 맡기고 사고하고 의사 결정하며 행동에 필요한 정보를 이용하는 등 보다 가치 있는 일에 몰두할 수 있다.
따라서 미래 컴퓨팅 접근방법은 인체로부터 실마리를 얻을 필요가 있다. 즉 스스로를 관리하고 신뢰성을 갖춘 컴퓨터와 전산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 자율 컴퓨팅 네트워크는 세 가지 핵심적인 속성이 있다. 첫째 반응이 빠르며 유연하다. 또 예측할 수 없는 온갖 상황에서도 ‘지능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 둘째 스스로 관리하고 치유한다. 문제가 생길 경우에도 직접 해결하거나 이에 필요한 리소스를 확보한다. 셋째 항상 접근이 가능하다. 자율 컴퓨팅 네트워크에는 장애시간이 없다.
이러한 시스템을 개발해야 하는 이유는 우선 데이터의 풍부함과 복잡성 때문이다. 데이터는 홍수처럼 불어나고 또 끊임없이 비 정형화된 형태로 생성, 저장, 공유되고 있다. 기존 형식의 데이터 역시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지만 웹페이지, 이미지 및 오디오 파일 같은 비정형화된 데이터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자율 컴퓨팅 네트워크를 구현해야 하는 두번째 이유는 사용자 및 연결 디바이스의 수이다. 앞으로 10년 안에 10억명의 사용자가 네트워크에 연결될 것이며 1조개에 달하는 작고 저렴한 디바이스가 네트워크에 연결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기술로 10억명의 사용자를 지원하기 위한 인프라를 운영하려면 무려 2억5000만명의 숙달된 인력이 필요하다는 자료도 있다. 그나마 이 수치는 네트워크에 추가될 1조 개의 임베디드 디바이스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자율 컴퓨팅 네트워크의 개발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인터넷의 미래이기도 하고 전자상거래(e비즈니스)도 이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 토대 위에 개인 및 기업에 상관없이 사용자에게 보다 개방적이고 내부 기술적으로는 복잡해지겠지만 더욱 지능적인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칩 개발과 로직(논리), 그리고 컴퓨팅성능 측정방법에 대한 접근법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빠른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에만 주력해왔다면 앞으로는 칩의 축적도를 다른 방법으로 이용해야 한다. 작고 고밀도의 프로세싱 파워의 핵심부문은 가능하면 메모리에 해당하는 단일 칩에 내장시켜야 할 것이다. 그 대신 네트워크상에 있는 데이터에 로직(논리)을 더 가까이 접목시키기 위해 로직을 점진적으로 네트워크상에 분산 배치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프로세싱 기능만을 분산하면 되기 때문에 로직(논리) 자체를 완전하게 분산시킬 필요는 없다. 즉 네트워크가 즉각적인 반응을 하고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게 하려면 네트워크 전반에 걸쳐 각종 탐지·결정·기능설정 등이 필요하다.
정보처리 속도만 비교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 성능에 대한 인식도 바꿀 필요가 있다. 사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정보처리 속도보다 응답시간이나 처리결과를 측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와 같은 칩과 논리에 대한 생각은 서버를 보는 관점과 직결된다. 일반적으로 컴퓨팅과 이를 수행하는 서버는 인간의 신경계처럼 보다 섬세하게 구성되고 적절히 산재돼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시스템과 네트워크는 프로세서와 메모리 및 커뮤니케이션을 통합한 여러 개의 단일 칩 셀들로 구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셀룰러 방식의 아키텍처는 컴퓨팅 기능을 데이터가 있는 곳까지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IBM은 또 이러한 파격적인 아키텍처를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다. 이 소프트웨어는 앞으로 컴퓨터가 스스로 관리하고 치유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예를 들어 방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복잡한 금융관련 업무를 시뮬레이션할 경우 셀 방식의 아키텍처에서는 이런 시나리오를 수많은 독립 프로세서에 나눠 맡기고 초고속으로 작업을 수행해 원하는 해답을 신속하게 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엄청난 가치의 정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미래에는 데이터가 네트워크 전체에 확산될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IBM은 획기적인 신개념을 연구하고 있다. 즉 모든 종류의 데이터를 보관하고 누구나 장벽 없이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상에 하나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SAN이나 NAS간의 차이나 스토리지 플랫폼 차별화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누구나 함께 사용 가능한 모듈 방식의 스토리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또 트랜잭션 혹은 단백질 구조에 대한 데이터든 혹은 웹페이지 및 강의 내용을 담은 비디오이든 데이터 소스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단 한번의 검색요청으로 필요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를 구현하는데는 미들웨어가 있어야 한다. 제대로 된 자율 컴퓨팅 네트워크는 모든 사용자에게 개방된 자동 네트워크의 ‘복합체’여야 한다. 이를 위해 미들웨어는 PDA, 휴대폰, 키오스크, 웹기반의 응용제품(어플라이언스), 임베디드 디바이스 및 전통적인 PC 등 모든 종류의 네트워크 접근 방식을 지원해야 한다. 또 전송되는 정보는 액세스 디바이스와 요청자에게 일차적으로 제공되겠지만 예기치 않게 증가하는 복수의 사용자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칩, 스토리지, 서버 및 네트워크를 포함한 이 모든 분야가 소프트웨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즉 자율 네트워크가 지녀야 할 특성인 신속한 응답성과 유연성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그리고 장애 없는 완벽한 e비즈니스 인프라를 어떻게 제공할 것인지 하는 과제가 모두 소프트웨어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사용자 입장에서 자율 컴퓨팅 네트워크의 장점은 개인 혹은 기업이 정액제 또는 사용한 만큼만 요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컴퓨팅 네트워크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기나 가스 및 수돗물처럼 컴퓨팅 파워를 사용하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 어떤 디바이스를 통해서든 안정적으로 손쉽게 이 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또 기계가 사람이 사용하는 (자연)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모든 유형의 데이터를 검색해 사용자에게 의미 있는 형태의 답변을 제공하게 된다. 비로소 인간 중심의 컴퓨팅이 완벽하게 구현되는 것이다.
인체의 시스템은 궁극적으로 유기체의 항상성을 유지시킨다. 즉 인체의 시스템이 생명유지를 위해 세심하게 구성돼 있듯이 자율 컴퓨팅 네트워크도 일종의 항상성을 제공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인간의 소화기 계통은 불연속적인 기능을 하는 반면 심장과 뇌는 연속적인 기능을 한다. 자율 컴퓨팅 네트워크 역시 이와 같은 복잡다단한 관리를 신뢰성 있게 수행해야 한다.
자율 컴퓨팅 네트워크의 구현은 그 특성상 점진적으로 현실화돼 갈 것이다. 이를 구축하려면 전체론적인 관점과 요소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가 필요하며 전산환경에 대한 전체적인 비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통합적이고 총체적인 기술이 컴퓨터의 ‘자율성’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기업도 단독으로 이 모든 것을 개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협업과 수많은 복잡한 문제들의 해결이 필수적이다. 통합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개별적인 접근을 통해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 미래의 자율 컴퓨팅 네트워크 구축을 선도하는 데 가장 유리할 것이다.
따라서 IBM은 기술 통합이라는 전략적인 비전 하에 까다로운 요소기술의 문제점 해결과 이들 요소기술을 하나의 완전한 개체로 통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 IT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우리사회의 미래가 이러한 목적의 달성 여부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폴 혼 박사(Dr. Paul Horn) 약력 IBM 연구개발담당 최고경영자(CTO·수석부사장)
IBM이 전세계 8개 연구소, 3000여명이 수행하는 연구개발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있다. 뉴욕 출신으로 클락슨공대를 졸업했다. 전공은 고체 물리학. 73년 로체스터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카고대 물리학 교수를 거쳐 79년 IBM에 입사했다. 그 후 20여년 동안 IBM에서 과학·반도체·스토리지 분야에서 주요한 직책을 맡아왔다.
또 미국 물리학회 펠로, 전미 과학재단 펠로, 알프레드 P 슬론 리서치 펠로와 피지컬 리뷰 레터스의 부 편집인을 지내는 등 다양한 학회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총 85편 이상의 과학기술 논문을 발표했으며 88년에는 미국결정학협회(ACA)로부터 버트럼 유진 워렌상을 수상했다.
혼 박사는 또 워싱턴 소재의 경쟁력 심의회와 정부-대학-업계 리서치 라운드테이블(GUIRR) 등 다양한 전문 위원회와 뉴욕 과학의 전당 이사회 멤버로도 활동하고 있다.
<정리=서기선기자 kssu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