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시대가 시작됐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산업사회가 물러가고 지식사회가 되면서 여성들이 중심 역할을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누구나 주역이 될 수 있는 인터넷의 대중화로 여성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 여성의 벤처창업과 경영진 진입은 어색하지 않은 모습이 되었다.
경기불황으로 수많은 베테랑 기업인들이 휘청거리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에서 벤처기업에 이르기까지 여성 최고경영자(CEO)들의 탄생과 활약은 두드러지고 있다. 그 선봉에 정보기술(IT)분야 벤처 업계의 여성 CEO들이 섰다.
국내 여성 벤처 CEO는 대략 300여명에 육박한다. 아직은 전체 벤처기업 CEO의 3.55% 정도에 불과한 규모다. 하지만 이들은 여러 난관을 딛고 일어서서 여성 벤처비즈니스의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다.
지난 80년대 여성 벤처 비즈니스의 신호탄을 쏟아올린 이화순 현민시스템 사장, 정희자 오토피스엔지니어링 사장, 이영남 이지디지탈 사장 등이 여성 CEO 1세대다. 90년대에 들어서는 서지현 버추얼텍 사장, 김혜정 삼경정보통신 사장 등이 여성 CEO 세대를 이어갔다. 90년대 말 벤처붐을 타고 창업한 대부분의 여성 CEO들은 3세대 그룹을 구성하며 ‘우먼 파워’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주역들이다. 이들 신세대 여성 기업인들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신선한 기획과 열정으로 그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 여기에다 예비 벤처 창업자만도 400명을 넘어서고 있어 조만간 남성 CEO 못지않은 파워를 과시할 때도 멀지 않은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여성들이 기업에서 임원이 되려면 하늘에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거니와 행여 된다 하더라도 보통 20년이 걸립니다. 하지만 인터넷은 아이디어만 있다면 여자든 남자든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죠.” 한 여성CEO가 창업을 결심한 이유다.
이들 중에는 대기업과 연구소 등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오거나 전문인의 이점을 살려 벤처기업을 차린 CEO들이 많다.
대학 재학중이거나 졸업직후 창업에 나선 여성 CEO들의 용기와 배짱도 대단하다. 심지어 지천명(知天命)의 50줄에 접어들어 창업하는 벤처 CEO들도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남편과 함께 공동 경영을 통해서 힘을 키우는 여성 기업인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성 CEO들 대부분은 화려하고 넉넉한 기반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퇴직금이나 집을 담보로 얻은 종잣돈으로 남의 사무실 한 귀퉁이를 빌려서 사업을 시작하는 사장들이 적지 않다. 지난해 대기업에서 ‘나홀로 창업’을 감행한 장혜정 이비젼 사장은 “여성 벤처기업가가 되고 싶은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실천하라”고 조언을 한다.
사회적·관념적 제약을 뛰어넘은 여성 기업인들에게서는 여러 강점이 발견된다. 섬세함과 유연성 등 여성 기업인들의 매력은 많다. 이를 바탕으로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는 지적 능력에는 여성, 남성의 차이가 없다. 사회적 관계나 명분을 중시하는 남성 경영자와 달리 여성 기업인들은 흐름을 읽어내는 감각에서 돋보인다. 사람의 마음 속 심연까지 파고드는 따뜻함도 묻어난다. 일에 대한 이들의 끝없는 욕심은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로 이어지고 있다.
한 30대 여성 CEO는 “과거 대기업에서 일할 때는 좋은 업무성과를 내더라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일하기 어려웠는데 창업 후에는 내 소신대로 일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성 벤처인들은 아직 여성이 사업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고 입을 모은다. 이는 여성에 대한 사회의 뿌리깊은 편견과 장벽이 높음을 반증하는 간접화법이다.
이제까지 여성에 대한 편견은 여성을 재능과 꿈을 가진 개인이라기보다는 (남성에 비해) 열등한 사람들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데서 비롯됐다. 이같은 편견은 여성 신입 사원 채용에서부터 단계별로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또한 제 아무리 능력있는 여성 CEO도 온갖 이해관계로 얽힌 네트워크에 들어 있지 않으면 성공하기가 어렵다.
맨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실리콘밸리에서 한국인 벤처신화를 일군 김태연 TYK그룹 회장은 “한국사회는 여성들에게는 몇 배나 힘든 구조다. 게다가 실력으로 되는 사회가 아니라 소위 ‘줄’이 있어야 성공하는 사회”라고 꼬집는다.
소프트웨어 분야 여성 벤처 CEO 1호인 이화순 사장은 “외부와 계약이나 업무를 협의하는 일 등 대부분의 기업환경이 남성 위주로만 짜여져 있어서 여성으로서 적응하기가 힘들었다”면서 “하지만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대화 기술과 사고의 유연성으로 조화를 이루고 극복하려 애써왔다”고 말한다.
육아나 가사 일도 큰 장벽이다. 이영아 컨텐츠코리아 사장은 “그동안 육아와 가정 문제로 수차례의 갈등과 고비가 있었다”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아울러 여성 CEO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대해서도 실질적으로 그러한지를 따져 봐야 한다. 여성이라서 주목받는 것보다 능력과 비전, 사업모델로 평가받고 주목받아야 하는 게 옳은 이치다. 여성 CEO인 아내를 둔 조유식 알라딘 사장은 “여성 CEO들에게서 남성과 별다른 차이를 못느낀다”고 말한다. 여성들은 남성, 여성의 구별이 아니라 누가 보다 효율적으로 일하고 많은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해 달라고 주문하고 있다.
“여성 CEO들이 무슨 특혜나 도움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능력과 사업 결과로만 평가해 달라”고 말하는 한 여성 CEO의 하소연은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조급하게 매출규모나 사업계획을 묻기에 앞서 여성 벤처인들이 기초를 튼튼히 다지고 있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시급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등을 면밀히 살피는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두되고 있는 것이 바로 생태계 조성론이다. 여성기업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잘 짜여진 유무형의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성기업인을 대상으로 하는 창업 교육과 지원 확대 정책들은 그 좋은 본보기다.
여성 기업인들도 마냥 주위의 시선을 탓하고 있을 만큼 한가롭지 않다.
이정숙 시그니아미디어그룹 사장은 “성공한 여성 기업인들은 한결같이 여성 차별을 논하기 전에 여성성을 장점으로 내세워 성공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며 “여성성을 장점으로 투철한 직업 의식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스스로의 노력과 실천이 우선될 때 여성 기업인 자신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각을 기대와 응원으로 바꿀 수 있다는 얘기다.
캐나다 인터넷이에스엘닷컴의 김연숙 사장은 “여성기업인은 무엇보다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려야 한다. 여성이기 때문에 특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애초에 버리고 남성들과 동등한 선상에서 경쟁하며 여성이기 때문에 뒤지는 부분이 있다면 몇 배의 노력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미래의 국가경쟁력은 여성 인력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식이 가치로 연결되고 있는 시점에서 보다 빠른 시간내에 여성의 자리매김이 이뤄질수록 국가경쟁력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여성CEO들이 많이 등장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에게 성공과 실패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지금 실패한다고 해도 다시 성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벤처의 매력이다.
새로운 역사를 써 가겠다는 여성 CEO들의 열정과 노력 때문에 대한민국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여성 CEO들은 자신들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테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여성 기업인들이 속속 싹을 틔울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 벤처CEO들이 우리나라 미래를 밝힐 홀씨가 되길 기대해 본다.
<온기홍기자 khoh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