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디스플레이산업은 지난 68년 오리온전기가 일본 도시바와 흑백TV용 브라운관 제조기술 도입 계약을 체결한 것을 필두로 69년 삼성이 NEC와 합작사를 설립하고, 74년 당시 금성사가 히타치와 기술제휴를 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 업체들은 경쟁력을 잃어가는 기존 제품들을 한국의 기술제휴처에 이전하고 자신들은 고부가가치제품에 전념하겠다는 전략을 세웠고, 기술력이 없던 국내 업체 역시 당시로서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브라운관 생산라인의 건설을 위해 기술도입처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런 한일간 파트너 관계는 80년대 말까지 유지됐다.
그러나 국내 브라운관 3사는 도입한 흑백브라운관 기술을 발전시켜 컬러브라운관에 필요한 유리벌브·형광체·섀도마스크 등 브라운관의 3대 핵심부품을 국산화하면서 세계 시장에서 자체 경쟁력을 높여나가기 시작했고 점차 일본 업체와의 직접적인 경쟁체제에 돌입하게 된다.
80년대 중반부터 국내 업체들이 부설 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자체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라인에 대한 엄청난 투자를 단행한 결과 93년에는 삼성SDI(당시 삼성전관)가 필립스를 제치고 세계 1위 업체가 됐으며,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 브라운관 생산국의 위치에 올라섰다.
물론 당시에는 14, 20인치 등 보급형 시장을 중심으로 무조건 뽑아내기식의 전략을 통해 세계 1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부가가치라는 측면에서는 큰 의미를 둘 수 없었지만 이후 대화면 제품과 완전평면 브라운관 개발에서도 일본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대등한 제품을 내놓게 되면서 이제는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에서 모두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술 도입에서 세계 1위 등극까지 20여년이 걸린 브라운관산업과 달리 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 LCD) 시장에서 1위가 되는 데는 1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95년 초기제품 양산을 시작으로 초고속 성장을 거듭한 우리나라는 최근 디스플레이서치가 발표한 2001년도 2분기 세계 시장점유율에서 41.5%를 차지하며 39.5%와 18.9%에 그친 일본과 대만을 따돌리고 마침내 1위에 올랐다.
업체별 순위 10위권에 삼성전자와 LG필립스LCD 두 회사밖에 없으면서도 전체 생산량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이는 체계적이고 과감한 투자가 낳은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업체들은 뛰어난 공정기술을 바탕으로 3.5세대부터 유리기판의 대형화를 주도한 결과 어떤 업체도 따라오지 못하는 생산성을 확보했다.
이른 시일 내 일본을 따라잡은 것에 대한 기쁨도 잠시. TFT LCD산업에 대만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다. ‘2005년 TFT LCD 세계 1위’를 목표로 삼은 대만은 99년부터 국가 차원의 대규모 투자를 실시하면서 급성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일본을 위협하는 한국을 견제하기 위한 일본의 대만 업체들에 대한 활발한 기술제휴 및 투자도 한몫했다.
그러나 이런 일본의 전략은 한국에 대한 견제효과보다는 오히려 대만 업체가 일본의 위치를 위협하는 상황을 낳았으며 TFT LCD 공급과잉이라는 산업적인 문제까지 낳게 됐다. 실제로 99년까지 절대적인 공급부족현상을 보이던 TFT LCD 시장에 대만이 뛰어들어 공급과잉으로 돌아서면서 현재 모든 업체들은 수익성 악화로 고전하면서 구조조정의 태풍에 휩싸여 있다.
초창기 TFT LCD산업을 주도하던 일본은 샤프와 미쓰비씨가 대폭적인 감산에 나서고, 세계시장점유율 7%를 기록하던 NEC가 모니터용 LCD 생산에서 아예 철수하기로 하는 등 가격하락에 의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다.
대만 업체들도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여전히 공격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에이서와 유니팩이 합병을 통해 경쟁력 강화를 꾀하고 있고, 대만의 대형 컬러필터업체인 캔두사가 하이닉스반도체 TFT LCD부문을 인수하면서 위협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앞으로 중대형 TFT LCD 시장에서 대만과의 한판 승부가 예상되며, 첨단산업 분야에서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 역시 TFT LCD산업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다행히 모니터용 TFT LCD에 대한 수요 증가에 힘입어 가격하락세가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등 시장 상황은 좋아질 것으로 보여 국내 업체의 적절한 투자가 이뤄진다면 향후 세계 최대 생산국으로서의 위치를 지킬 수 있을 전망이다.
플라즈마디스플레이패널(PDP)과 유기EL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산업에 대한 전망은 매우 밝다. 브라운관 및 TFT LCD사업과는 달리 일본 업체와 비슷한 시기에 개발 및 투자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9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기대되는 PDP 분야에서는 일본 FHP의 양산 개시에 발맞춰 LG전자와 삼성SDI도 양산에 들어갔으며 오리온전기·UPD 등도 뛰어들었다. 초기 일본에서 설비를 들여와 생산에 나설 수밖에 없던 브라운관 및 TFT LCD산업과는 달리 처음부터 노광기·검사기·배기로·절단기·스크린마스크 등 핵심설비 및 재료의 국산화를 병행하고 있다는 점은 대단히 고무적인 현상이다.
차세대평판표시장치기반기술(G7)사업 등을 통해 산학협동연구가 잘 이뤄졌기 때문에 국내 PDP산업의 기초는 비교적 탄탄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각 업체는 PDP의 조기 대중화를 위해 새로운 재료와 공정기술을 개발하고 수율을 향상시킴으로써 원가를 낮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각광받는 유기EL 디스플레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9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2003년 국제 유기EL 콘퍼런스를 국내에서 유치하는 등 연구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현재 삼성SDI·LG전자 등 대기업에서 연말 양산에 들어가 시장을 선점한다는 전략 하에 생산라인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아직 기술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유기EL 분야에서 산업을 선도할 수 있는 차세대 기술을 개발하려는 벤처기업들의 열기도 뜨겁다.
현재 네스디스플레이·엘리아테크·CLD·스마트디스플레이 등 다양한 벤처기업들이 각자의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이의 상용화를 위해 연구 중이며 전문가들은 물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원천물질이 제품의 성능을 크게 좌우하는 유기EL 디스플레이의 특성상 물질에 대한 기술 없이 좋은 제품을 만들어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기초 원천기술이 부족한 것이 항상 문제점으로 대두되는 우리나라로서는 아직 상용화가 이뤄지지 않은 유기EL 분야에서만큼은 원천기술 확보를 위해 좀더 노력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진영기자 jych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