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캐시호가 출항 1년 3개월여 만에 최대 고비를 맞았다.
SK텔레콤·삼성물산·롯데칠성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들과 비자의 13개 국내 회원사들이 주주사로 참여하는 화려한 위용을 자랑했지만, 본격적인 시장진입을 앞둔 요즘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사태를 표면화시킨 것은 최근 신임 사장으로 SK텔레콤 출신 손재택 상무가 전격 선임되면서다. 경영의 무게중심이 ‘SK텔레콤’으로 급격히 쏠린 것은 물론, 경영진과 내부직원의 업무추진 관행은 그동안 상용보급을 지연시킨 주요인이었다며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신임 손 사장 체제가 공식화하면서 비자캐시 창립멤버와 추가 합류한 멤버간 갈등도 점차 드러나 내부 직원들이 동요하는 분위기는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한마디로 경영체제를 둘러싼 내부의 갈등과 경쟁사에 비해 뒤처진 행보가 비자캐시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선 비자캐시 주주사들은 신임 손 사장의 취임을 8일 주총에서 공식화할 계획이다. 현재로선 SK텔레콤만이 25% 지분만큼의 증자 참여를 확정지은 상태. 삼성·롯데는 물론 36.3%의 지분을 분산 보유한 13개 금융기관들도 증자 참여에는 부정적이다. 경우에 따라선 당초 10월로 예정됐던 증자의 연기와 함께 증자규모도 100억원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으로 축소될 공산이 크다. 비자캐시 관계자는 “사실상 SK텔레콤의 계열사로 편입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원래 비자캐시 설립 약관상 명시됐던 ‘대주주가 1차 증자분의 실권을 인수할 수 없다’는 조항도 증자후 이사회를 통해 변경될 소지가 크다”고 말했다. 비자캐시 출자 당시 SK텔레콤은 출자한도 제한규정에서 예외로 적용받을 수 있고, 내년초 SK신세기통신과의 합병이 마무리되면 더욱 운신이 폭이 넓어질 수 있다는 점도 이같은 설명을 뒷받침한다. ‘글로벌 브랜드’인 비자캐시의 소유주이자 현재 7%의 지분을 보유한 비자측은 이를 정면 부정하고 있다. 현재 전자화폐의 사업성을 고려할 때 SK텔레콤이 계열사로 편입할 만큼 매력은 없는데다 전자화폐의 ‘범용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비자캐시가 이렇게 진통을 겪게 된 데는 그동안 여러 대주주, 특히 SK텔레콤과 비자의 압박에 둘러싸였던 속앓이를 반영하고 있다. 1년 이상 준비하고도 상용서비스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외부의 비판도 있지만 설립당시 구상했던 각종 스마트카드 관련 사업을 주주사들로부터 지원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자캐시가 당초 추진하려 했던 ‘비자넷’ 사업을 SK텔레콤이 가져간 것이나, 전자화폐보다는 신용·직불 IC카드(EMV)에 욕심을 내는 비자인터내셔널의 오픈마인드(?) 정책이 단적인 사례다. 실제로 비자코리아는 IC카드 표준규격인 ‘EMV’와 ‘자바카드’를 수용할 경우 모든 전자화폐 상품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경쟁사인 에이캐시·K캐시에도 비자 브랜드를 부여하겠다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여기다 비자캐시가 상용보급의 계기로 사실상 총력을 쏟고 있는 SK텔레콤 제휴카드(일명 모네타카드) 사업도 최근 서울시가 제동을 걸고 나옴으로써 위기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상용발급이 상당기간 늦춰지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 서울시와의 법적 대결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비자코리아 관계자는 “비자캐시로서는 모네타카드에 사실상 목줄이 달려있는 상황”이라며 “극한대결로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당초 비접촉식(RF) 교통카드와 이동통신 로열티의 결합을 차별화요소로 내세우려던 구상도 교통카드가 빠진 채 ‘휴대폰 접촉식 카드’ 상품으로 축소될 공산이 커졌다.
비자캐시호의 미래는 이래저래 불투명한 상황이지만, 결국 관건은 상용보급의 계기가 될 SK텔레콤 모네타카드의 성공적인 시장진입 여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비자캐시 관계자는 “모네타카드가 성공적으로 발급, 사용되면 비자캐시는 SK텔레콤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등에 업고 나서게 되지만, 반대의 상황이 펼쳐질 경우 휴대폰 단말기의 개인인증모듈(SIM)카드로 전락할 우려도 있다”고 고백했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