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의 진척이 우리 생활에 몰고 온 파급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특히 그 속도가 가공할 정도로 빠른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TV·휴대폰·인터넷이 없는 생활은 상상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누구나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휴대폰을 챙기고, 집에 들어가면 TV를 제일 먼저 켜고, 저녁이면 PC로 인터넷에 접속해 e메일을 체크한다. 채팅까지 겸한 네트워크 게임은 물론 각종 동호회 활동과 다양한 문화체험 및 온라인 교육 등 정보화를 통해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은 180도 달라졌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이것이 21세기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의 헤어진 반쪽, 북한의 주민들은 과연 어떨까.
남북한 관계는 지난해 대통령의 방북과 6·15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급속도로 호전되고 있다. 통일시대가 눈앞에 다가왔음을 온 국민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시점이다. 경수로사업·금강산관광사업·체육문화교류사업·남북이산가족재회 등 각 부문에서 교류의 물꼬가 트이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교류가 활발해질수록 우려되는 점이 적지 않다. 특히 북한이 남한에 비해 정보화에서 현저히 뒤져 있음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식정보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21세기에는 정보가 곧 돈이고 정보력이 곧 경쟁력이다. 이전 세기와 달리 이제는 정보화에서 뒤지면 경제적으로 낙후성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황=북한의 정보통신 인프라는 남한의 70년대 수준으로 평가된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http://www.itu.org)의 세계통신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통신회선은 99년 현재 약 110만회선으로 남한 2151만회선의 19분의 1 수준이다. 100인당 회선수도 4.64회선으로 남한의 43.79에 비해 9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 주민은 대개 공중전화를 이용하는데 그나마 대도시의 주요 지점과 시군 지역의 체신소에 제한적으로 설치돼 있는 실정이다. 그것도 96년까지 2720여대에 불과했을 정도다.
통신시설의 디지털화 정도도 문제다. 남한의 경우 디지털화가 65.1% 진척된 반면 북한은 4.6%밖에 되지 않는다. 평양에 프랑스 알카텔사의 전자식 교환기 2대가 설치돼 있는 정도다.
무선통신시설은 대부분 군부·사회안전부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공중업무용 이동전화와 무선호출서비스는 나진·선봉 지역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인터넷 역시 당·정·군 등 일부 기관에 엄격히 제한돼 있다. 평양에 있는 유엔기구나 외국 대사관은 국제전화를 통해 인터넷에 접속해 전자우편을 송수신하고 있다.
국제전화의 경우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북한은 중국·러시아 등과의 마이크로웨이브나 육상 케이블망이 연결돼 있고 여타 국가와는 인텔샛 위성을 경유해 100여개국 이상과 통신하고 있는데 일반인들이 국제전화를 이용하는 것은 제한돼 있다.
◇선결과제=남북한간의 정보격차를 줄이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일까.
현대경제연구원 이태섭 연구위원은 “전반적으로 볼 때 북한은 정보화에 필수적인 인프라가 매우 취약하다”며 “남북 정보화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통신 인프라에 대한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이 시급하다”고 말했다.(월간 통일경제 2000년 8월호)
특히 전화교환기 교체와 광섬유 케이블화 공사 등 통신망 현대화사업이 시급히 요청된다는 것. “통신사업은 시장 선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북한의 통신망 현대화를 외국 자본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한의 지원이 시급히 선행돼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북한에 정보화 혜택이 미치려면 하드웨어와 기술의 대북 반출이 허용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컴퓨터의 보급이 시급하다. 북한의 컴퓨터 보급사업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책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물자 반출을 가로막는 요인인 바세나르협약이 재고돼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한국통신 통신망연구소의 김주진 실장은 통일IT포럼 1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북한 통신망의 현대화를 위해서는 남북간 통신망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는 것도 필요하다”며 “우선 남북간 두 지점에 전용회선을 늘리고 통신 확대에 맞춰 공중통신망 접속을 진행하며 차츰 광케이블 포설 및 가입자망 구축 등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전망 및 대책=북한의 정보화를 앞당기고 남한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정부와 민간이 함께 나서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물론 북한에서도 자생적으로 정보화 인프라 구축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나진·선봉 지역에 제한되긴 하지만 동북아전신전화회사가 2000년까지 이 일대에 수동식교환기 4만회선, 이동통신설비 1200회선, 무선호출통신설비 1500회선을 구축키로 한 바 있다.
북한의 통신현대화 사업에 대한 지원에는 정부와 민간의 적절한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공공성 측면의 사업은 정부가, 상업성 측면의 사업은 기업이 맡아야 할 것이다.
우선 정부의 역할이 중요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통일 독일의 사례가 좋은 교훈이다. 통일 후 독일 정부는 동독 지역의 낙후된 정보통신 인프라를 현대화하기 위해 ‘텔레콤 2000’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90년부터 97년까지 계속된 이 사업에는 무려 600억마르크(약 32조원)가 투자됐는데 이 결과 동독 지역의 통신회선이 대폭 늘어났다. 이를 통해 민간 분야의 교류 확대와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 빨라졌음은 물론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통신 남북협력팀의 이정훈 팀장은 “북한 통신 시장에 대한 경쟁적인 진출에 따른 중복투자문제, 남북한간 균형적인 통신발전 추진문제 등을 고려할 때 가능한 한 이른 시일 내 남북 당국간에 이 문제를 놓고 협력이 추진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북한 통신현대화를 위한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마스터플랜 수립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북한 통신의 현대화는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재원이 필요하고 단기간에 수익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거나 분야별 전문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정소영기자 syjung@etnews.co.kr>
◆인터뷰-통일IT포럼 박찬모 회장
50년 분단 역사가 만든 깊은 불신의 골이 정보화 물꼬와 함께 맑은 물로 채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기대를 현실로 만들어가는 이들이 바로 대북IT교류 민간전문가들의 모임인 통일IT포럼이다. 이 포럼의 회장을 맡고 있는 박찬모 포항공대 대학원장은 지난 1년여간 포럼을 이끌어오면서 가장 심각하게 느끼는 점이 남북한간 정보화 격차라고 말한다.
“북한에서도 컴퓨터 전문가, 즉 대학이나 연구소 연구원들의 정보화 수준은 매우 높아서 남한과 대동소이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 대부분은 가정에 컴퓨터가 없고 있더라도 네트워크에 연결돼 있지 않아 정보화 수준이 매우 낮지요. 특히 남한은 PC나 초고속망 이용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과 정보화 격차는 상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북한의 균등 발전과 통일 이후의 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해서도 정보격차를 줄이는 일은 필수불가결하다. 그렇다면 남한에서 도울 방법은 없을까.
“민간 차원에서는 IT 관련 도서나 PC 기증 등이 추진되고 있기도 합니다만 남북간 격차를 줄이려면 북한의 인프라 구축이 선행돼야 합니다. 지금과 같이 바세나르협약 등으로 486급 PC마저 줄 수 없다면 격차를 줄인다는 것은 요원합니다. 바세나르협약의 탄력적인 적용과 북한의 특구 설정 등을 통해 어느 정도의 장비가 들어갈 수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북한 내부의 문제도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도 정보통신기술이 산업 발전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지만 통신 개방이 자유물결 침입의 원인이 될까봐 염려하고 있다.
박 회장은 이에 대해 “북한이 하루 속히 인터넷을 수용하고 개방정책을 펼쳐야만 정보화가 제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못박았다.
실제로 북한에 정보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은 돈과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지만 개방정책을 펼치지 않는다면 이런 노력은 모두 허사다. 결국 북한의 정보화는 북한 당국의 정치적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얘기기도 하다.
박 회장은 이런 상황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 ‘민간 차원의 교류와 협력’이라고 힘줘 말한다. 남북 커뮤니케이션의 장벽이 무너지면 정보격차도 수월하게 해소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대북 관계에 대한 마인드 전환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둘의 힘을 합쳐 시너지 효과를 얻는 윈윈 게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누가 이기고 지는 게 아닙니다. 한민족이지 않습니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