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말 본격적인 다매체 다채널 시대가 도래하면서 방송 콘텐츠가 디지털 콘텐츠의 핵심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동안 지상파 및 케이블TV에 쏠려 있던 방송 채널은 연내 디지털 위성방송 서비스 개시로 순식간에 150여개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같은 폭발적인 채널 수 증가는 올해 3월부터 실시된 프로그램공급업자(PP) 등록제와도 맞물려 있다.
기존에 1·2차 승인 PP의 수는 고작 43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등록제 실시 4개월 이후인 2001년 6월 현재 PP는 81개 사업자 191개 채널로 불어났다.
향후 위성방송이 단계적으로 채널을 늘려나간다는 점을 감안할 때 PP의 숫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문화부가 지난 6월 발표한 참고자료에 따르면 오는 2005년 등록 PP 및 지상파 채널을 비롯한 총 방송 채널수는 230여개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에 따라 지난해 4조6000여억원에 머물렀던 방송 영상산업 규모는 올해를 기점으로 5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함께 올 11월부터 본격화될 지상파 디지털 방송은 디지털TV 및 수신기 등 관련 산업의 동반 성장도 예고하고 있다.
게다가 올해초 통합 방송법이 시행되면서 기존의 ‘케이블TV에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사업자’로 제한받아온 PP의 지위는 케이블·위성방송은 물론 다양한 매체에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채널사용사업자’ 개념으로 확대됐다.
바야흐로 방송 콘텐츠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은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방송 채널의 증가와 이에 따른 신규 PP의 대거 등장이 방송 콘텐츠 시장의 양적인 팽창을 가져왔을지 모르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알맹이가 없다.
단적으로 위성방송의 채널 편성 결과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위성방송측은 당초 다양한 틈새 채널 및 신규 사업자를 최대한 받아들인다는 방침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같은 약속을 지키기에는 신규 PP들의 콘텐츠가 너무 부실해 대신 지상파 및 복수PP(MPP)들이 채널 사업권을 따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영화·스포츠·음악 등 오락적인 성향이 짙은 장르에 채널이 몰리는 결과를 낳았다. KBS를 비롯한 지상파 방송 3사 계열사는 각각 채널 3개씩을 위성방송에 제공하게 됐지만 스포츠·드라마 장르가 대부분이다.
일각에서는 이같은 지상파 방송사의 장르 편중 현상이 장기적으로는 지상파 방송의 콘텐츠 시장 독점 현상을 부추길 뿐만 아니라 독창적인 콘텐츠로 승부를 거는 틈새 채널들의 발전을 가로막을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같은 우려는 영세한 신규 PP들이 채널 사업을 포기하는 사례에서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안정적인 사업 기반 및 자금력을 갖춘 MPP 및 지상파 방송사에 비해 단일 채널만을 운영하는 신규 PP들은 초기 시장 진입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특히 자금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양질의 콘텐츠 확보 문제는 모든 신규 PP들이 안고 있는 과제다. 기획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자체 프로그램 제작비가 부족해 부실한 콘텐츠가 양산되는 사례는 허다하다.
해외 프로그램으로 시간을 채우려 해도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는 영화를 비롯한 몇몇 장르에 경쟁 사업자가 속출하면서 콘텐츠 수급을 위한 판권료가 지난해 대비 3∼4배까지 치솟는 등 외부 요건들은 점점 악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부 PP들은 질낮은 해외 프로그램들을 싼 값에 사들여 시간 때우기용으로 편성하는 사례도 종종 눈에 띈다.
이같은 콘텐츠 빈곤의 악순환은 광고 수입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난 6월 PP협의회가 주최한 ‘케이블TV 광고 세미나’에서 제일기획 박정래 수석은 “콘텐츠 재방률이 확대되고 저가 보급형 중심의 콘텐츠가 늘어나게 되면 시청률이 감소해 결국 광고시장의 성장률은 감소될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림1 참조
결국 콘텐츠 질의 저하는 시청률 하락에 따른 수신료 및 광고 수익 감소로 이어져 PP의 사정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같은 외적인 걸림돌만을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무엇보다 PP업계에서는 안정적인 제작 환경 위에서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정부 지원책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 PP협의회는 케이블TV방송국(SO) 및 PP의 방송발전기금 200억원에서 연간 80억∼90억원을 대출받는 것이 정부 지원의 전부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정보화촉진기금에서 간헐적인 지원이 이뤄졌지만 어디까지나 하드웨어를 비롯한 방송 인프라 구축에 쓰여졌을 뿐 콘텐츠 육성에 할당된 지원금은 전무했다는 주장이다.
향후 PP들은 콘텐츠 제작은 물론 디지털화에 소요되는 비용 등을 고려할 때 정부가 적극적으로 기금 조성 사업 등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같은 맥락에서 지난 6월 문화부가 발표한 ‘디지털 시대 방송영상산업 진흥정책 추진전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안에 따르면 문화부는 2005년까지 총 3163억원을 투입해 방송인력 육성 및 콘텐츠 진흥을 위한 7대 중점 과제를 추진할 계획이다. 특히 방송 프로그램 제작비 지원 부문에서 독립 제작사에 대한 지원 자금을 올해 192억원에서 2005년에는 492억원까지 늘려나갈 예정이다.
PP업계에서는 이같은 정부의 노력이 생색내기 차원에서 그치지 말고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추진 주체들의 역할도 보다 명확해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 방송산업 전반에 대한 육성책은 문화부가 제시하고 있지만 방송 정책을 총괄하는 방송위원회와 상호 협력이 미비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문화부가 6월 제시한 진흥정책 역시 방송위와의 사전 협의없이 발표됐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온 것은 유기적인 대화 채널이 가동되고 있지 않다는 준거를 보여준다.
특히 PP들은 근본적으로 자신들이 제작한 프로그램에 대해 사용료는 물론, 저작권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PP측은 다매체 시대의 도래로 수익 창출 경로가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 사용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피해 의식을 갖고 있다.
막대한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해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수신료를 받고 이를 다시 양질의 콘텐츠 양산에 투입하는 것만이 부실해진 방송 콘텐츠 산업을 부흥시킬 수 있는 ‘정도’라는 얘기다.
<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