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사업을 시작한 이들에게 벤처캐피털은 단순히 한때 유행하는 자본조달 수단이라기보다는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보증하는 ‘인증서’로 자리잡은 듯하다.
중기청에 등록된 벤처캐피털 회사가 8월말 현재 146개에 이르고 지난 일년 동안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본규모가 총 7조1000억여원에 달하며, 이들로부터 투자받은 벤처기업이 총 6000여개나 된다. 테헤란로에 자리잡은 필자의 사무실 창에 비치는 벤처투자회사 간판만 열개가 넘는다.
그러나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벤처캐피털이란 그저 담보가 부족한 중소기업들에 신용으로 지원하는 정책자금 정도로 인식됐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그나마 몇 안되던 벤처캐피털의 투자 담당자들은 열악한 투자환경을 탓하며 벤처에 대한 열정을 삭이고 있었고, “벤처는 없다”는 말로 스스로를 자조하기도 했다. 필자도 우리나라 벤처산업에 대한 뚜렷한 확신 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던 경험을 예외없이 갖고 있다.
“길목인줄 알고 남보다 앞서 투자했는데 길은 열리지도 않았으며, 지금 와보니 막다른 골목이고 갈 길은 바쁜데 발목까지 잡혔다.”
한 중견창투사의 투자담당 A이사의 고민이다. 다음 세대를 이어갈 유망 투자분야가 무엇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해까지 창투사마다 문전성시를 이뤘던 무선인터넷 산업이나 광(光)기술 분야의 성장이 예상보다 주춤하면서 이 분야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창투사들은 곤경에 처했다. 게다가 코스닥의 침체로 자금의 회수전망이 불투명해져 재원고갈·투자침체라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졌다.
경기침체를 예상해 나름대로 보수적 전략을 세워 벤처투자를 자제했다는 신설창투사의 임원에게도 뜻밖의 고민이 있었다. 예금금리가 4%대로 떨어져 미투자자산의 운용수익이 적어지자 이 자금에 관심이 높은 자금주들로부터 투자활동이 부진하다는 책망과 함께 다른 용도로 사용하겠다는 압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본시장의 특성상 벤처투자 후 수익이 날 때까지 3년 이상 기다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미국처럼 각종 연기금이 벤처 재원의 대부분을 이룰 경우 5년 이상 기다리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장기투자가 보장되는 벤처투자펀드 조성에 적극 나서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문화가 정착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최근 여기저기서 벤처캐피털들이 생존을 위해 고심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업무 및 조직에 대한 컨설팅을 실시하고, 투자기업에 대해 자금지원뿐만 아니라 경영·마케팅·홍보 등에 이르기까지 입체적 지원을 확대하는 등 우리의 벤처캐피털들이 한단계 성숙하기 위한 것들이 되길 기대해본다.
이런 현실에서 필자는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우리 벤처산업이 한단계 올라서기 위해서는 벤처투자의 역할분담이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즉 처음 둥지를 트는 신생벤처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와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오른 벤처에 대한 단기적인 대규모 투자는 각각 구분돼야 한다. 자금규모만 다른 것이 아니라 감내해야 하는 투자 위험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벤처캐피털과 인큐베이팅 기업과의 유기적인 협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다.
<송낙경 KTB인큐베이팅 사장 song@ktb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