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 전개과정에서 전쟁은 늘 있어왔다. 최근 뉴욕 세계무역센터를 붕괴시킨 테러도 하나의 전쟁 방식이며, 이에 대응해 미국이 슬픈 눈물의 나라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한 것도 전쟁이라는 범주에 포함된다.
이러한 전쟁수행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통신매체다. 빈 라덴을 디지털 테러리스트라고 말하는 것도 그가 활용하는 통신매체에 대해 적용되는 말이고, 교란전파를 발사해 통신을 무력화시키는 미국의 작전도 상대의 통신매체 활용을 저지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작전이다. 또한 이미 종료된 대규모 전쟁에서도 통신매체의 활용이 그 전쟁의 승패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1904년 2월. 일본은 조선과 중국의 만주지역에 걸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러시아와 한판 전쟁을 시작했다. 조선과 만주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으로 10년 동안 국력을 총 결집하여 준비한 전쟁이었다. 러·일전쟁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 전쟁의 승패는 러시아의 발틱함대와 일본의 연합함대가 전투를 벌인 쓰시마 해전에서 갈렸고, 그 전투의 승패를 가른 핵심적인 요소 하나가 바로 무선전보였다. 무선전보 하나가 한반도를 비롯한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쓰시마 해전은 1905년 5월 27일부터 이틀 간 일본 연합함대와 러시아 발틱함대가 쓰시마해협과 울릉도 앞 바다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벌인 세기적 해전으로, 사상 최초로 강철을 사용하여 건조한 군함을 가지고 벌인 대규모 함대 전투였다는 점에서도 유명한 해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일본이 선전포고 이전에 야비하게 뤼순기지에 있던 러시아 극동함대를 기습하여 치명적인 전력 손실을 입히자 러시아 츠아 정부는 개전 이래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해군 주력 발틱함대를 동양으로 출동시켰다. 장장 1만8000마일을 달리는, 일본이 국제적으로 벌인 정치적 방해로 열대의 무더위 속을 지나야 하는 지루하고 먼 항해였다. 1905년 4월 발틱함대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캄란만에 도착하게 되었지만 이미 뤼순항의 극동함대는 일본에 함락 당한 후 였고, 장병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이제 발틱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어떠한 방식, 어떠한 뱃길로 가더라도 일본 부근을 지나야만 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발틱함대는 배의 연료로 쓰이는 석탄을 보충하고 불필요한 보조 함선을 상하이로 들여보낸 후 1905년 5월 14일 블라디보스토크로 항진을 시작했다.
5월 27일. 총 38척의 발틱함대가 쓰시마해협으로 들어섰다.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는 함대 최선봉의 수바로프호에 타고 각 함대를 종렬진으로 편성하여 지휘하고 있었다. 안개가 약간 깔린 날씨. 강한 바람이 일고 험상한 파도가 굽이쳤다.
‘적함 발견!’
1905년 5월 27일 새벽, 쓰시마해협 남쪽에서 활동중이던 일본의 가장(假裝) 순양함 ‘신농환’에서 ‘적함 발견’이란 무선전보가 전파에 실렸다.
진해만에서 도오고오 해군 대장의 지휘하에 대기중이던 일본 연합함대는 ‘적함 발견’이란 무선전보를 접수하고 즉각 전투태세로 돌입하여 발틱함대를 기다렸다. 정오 무렵, 드디어 러시아와 일본의 해군 주력이 조우하게 되어 세기적 해전이 시작되었다.
종렬진으로 항해하는 러시아 발틱함대를 일본 연합함대는 T자형 전법으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맨 앞에 선 수바로프호가 첫 번째 목표. 수바로프호는 진로를 가로막고 함대의 앞과 뒤의 발포로 쉴새없이 공격해 오는 연합함대의 함포사격을 견디지 못하고 크게 파손되고 말았다. 그 전함에 타고 있던 함대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도 중상을 입어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지고, 급기야는 전함 자체도 침몰하게 되어 승무원 900명이 한 사람의 생존자도 없이 수장되고 말았다.
기선을 제압한 연합함대의 끈질긴 공격에 오슬리아비아호, 알렉산더호, 보로디노호 등 발틱함대의 주력이 속속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튿날까지 계속된 해전에서 러시아 장병 5000명이 수장되고, 6000명이 넘는 병사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38척의 발틱 함대 중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달아난 것은 단 3척, 순앙함 1척과 구축함 2척 뿐이었다.
여기서, 쓰시마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무선으로 전해진 전보였다. ‘적함 발견’이라는 그 전보가 없었다면 쓰시마 해전은 물론 러·일전쟁의 승패와, 세계 역사의 전개 방향도 변화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쓰시마 해전의 승패를 결정지은 그 전보문은 어떠한 형대로 진해만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 연합함대로 중계되었는가.
현재 일본 우정성 체신종합박물관에는 당시 연합함대가 주고받은 전보에 관련된 자료가 남아있다. ‘신농환’과 제3함대 기함 ‘엄도’, 연합함대의 기함 ‘삼립’ 사이에 러시아 함대의 발견과 위치를 알리는 내용과 즉시 닻을 올리고 출항하라는 명령의 무선전보 내용, 전투가 시작된 후 빈번히 통신 된 무선전보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자료를 통해 당시 ‘신농환’이 러시아 함대를 발견한 것은 새벽 5시였고, 장소는 203지점이었으며, ‘신농환’의 무전전보를 최초로 받은 것은 일본함대 중 ‘엄도’였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나라 거문도 무선송신소를 거쳐 중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찰중에 러시아 발틱함대의 이동을 최초로 발견한 가장 순양함 ‘신농환’이 ‘적함 발견’이라는 무선전신을 거문도의 무선중계소로 보냈고, 거문도 무선중계소에서는 이 전보를 ‘엄도’로 중계했다. 이어 ‘엄도’에서는 진해만 해군기지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 연합함대로 전보를 보냈고, 연합함대에서는 그 정보에 따라 신속하게 작전을 전개, 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러·일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가장 순양함 ‘신농환’에는 쓰시마 해전이 끝난 후인 1905년 6월 20일 동양 연합함대 사령관으로부터 감사장이 수여되었다. 러·일전쟁 당시 거문도의 무선중계소는 현재 설치되어 운영중인 한국통신의 통신시설과는 다른 지점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거문도 무선중계소에서 중계된 ‘적함발견’에 관한 일화는 거문도에 이주해 살았던 일본인들에 의해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다음의 내용은 한 일본인이 쓴 ‘거문도’라는 책에 기록된 글이다.
“‘신농환’의 무선통신을 접수하여 진해에 있는 연합함대로 보낸 것은 거문도 서도 전수월산에 있던 일본해군의 무전탑이었다고 제가 어릴 때 조부(거문도에 최초로 정착한 일본인 목촌충태랑)로부터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조부는 거문도에 이주하자마자 일본 해군으로부터 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산구현 거주 중촌창이씨)”
당시 러시아의 발틱함대도 본국을 출발하기 전 독일 텔레푼겐사의 무선전신기를 구입하여 설치하고 독일인 기사를 태웠다. 그러나 독일인 기사는 군대 규율의 번잡함에 싫증을 느껴 마다가스카르섬에서 배를 내려 버렸다.
이후 일절 무선통신을 하지 못한 러시아 발틱함대는 무전전보를 통해 자기들의 위치를 파악한 후 기다리고 있던 일본의 연합함대에 말 그대로 박살이 나서 침몰되고 말았고, 그 와중에 슬픈 눈물의 나라 조선은 일본의 본격적인 침탈에 의해 역사 속으로 침몰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