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기자와의 만남이 비교적 잦은 최고경영자(CEO)가 한 명 있다. 대우전자 장기형 사장(58)이 바로 그다. 인터뷰가 있던 날은 오전과 오후 두 차례나 만났다. 올해 들어서만 서울과 지방에서 벌써 다섯번 정도 마주친 것 같다. 비단 기자뿐만이 아니다. 가전 3사를 출입하는 기자들에게 최근 1년 사이에 가장 자주 접한 CEO를 꼽으라면 대다수가 그를 지목할 것이다.
장 사장이 바지런한 것도 이유지만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기업으로 선정된 이후 잔뜩 움추렸던 대우전자가 지난해 10월 ‘매각을 통한 조기 경영정상화’로 기본방향을 확정한 후 다시 공격적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특히 매각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데다 보급형 HDTV를 비롯해 산소에어컨·무세제 세탁기 등 첨단 신제품을 속속 발표하면서 대우전자의 행보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기자들이 장 사장의 일거수 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자주 만나야지요. 기자는 물론 채권단·협력업체·노조·정부관계자 등 회사의 조기 경영정상화에 도움이 된다면 누구든 만나야지요.”
지난 99년 8월 대우전자를 포함한 대우그룹 12개 계열사가 워크아웃 기업으로 지정된 직후 CEO를 맡은 장 사장이 취임과 동시에 3대 경영모토로 내세운 것이 투명경영·책임경영·가치경영이다. 이중에서도 장 사장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투명경영이다.
“워크아웃 직후 대우전자에 등을 돌렸던 부품업체와 바이어들을 다시 돌아오게 만들고 채권단이 부채 중 일부를 출자전환키로 하는 등 지금처럼 대우전자가 매각을 통해 경영정상화를 모색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국은 투명경영을 통해 그들로부터 신뢰를 쌓은 결과로 봅니다.”
장 사장은 취임후 줄곧 임원회의를 포함한 중요한 회의 때마다 채권단 관계자를 꼭 배석시켜 왔다. 처음엔 채권단의 신뢰를 얻기 위한 한 방법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사업 전반에 걸쳐 채권단과의 허심탄회한 의견교환을 통해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자리로 활용하고 있다.
대우전자가 워크아웃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32인치와 36인치 디지털 HDTV를 업계 최초로 출시한 것을 비롯해 산소에어컨과 무세제 세탁기를 세계 최초로 상품화하는 등 삼성전자나 LG전자 못지않게 왕성한 사업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같은 배경에서다.
일례로 대우전자가 모두가 망설였던 무세제 세탁기의 상품화를 결정하고 200억원 이상을 투자하려고 했을 때 채권단에선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피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친 회의를 통해 회사의 가치를 높여 제값을 받고 회사를 매각하거나 독자경영의 기틀을 마련하려면 무세제 세탁기의 상품화가 절실하다는 장 사장의 지속적인 설득작업에 채권단도 끝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후문이다.
“기업이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켜 줄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그 기업의 미래 또한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회사의 가치를 높이는 데 필요한 신제품의 상품화를 위해선 연구개발(R&D)부문에 지속적으로 투자를 해야지요.”
대우전자는 올해 2000억원을 R&D부문에 투자했다. 과거 워크아웃 이전에 비해 상당히 줄었지만 워크아웃 상태인 대우전자로선 적지 않은 금액이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기인 만큼 이 중 상당 금액을 디지털TV를 비롯해 에어컨·세탁기 등 주력품목을 양산하는 데 투입했다.
지난해 채권단과 맺은 MOU계획을 8% 초과한 166억원의 영업이익을 창출하고 올 상반기에도 무려 545억원의 영업이익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효율적인 투자를 통해 신제품을 적기에 출시한 결과라는 게 장 사장의 설명이다.
“대우전자가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가치경영입니다. 한 푼이라도 이익을 더 내야 회사경영이 유지되고 특히 제값을 받고 매각하려면 캐시플로(Cash Flow)의 확보로 회사의 가치를 극대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우전자와 채권단은 지난해 10월 매각을 통한 경영정상화로 방향을 확정한 후 반도체·무선중계기·목동신사옥 등 비주력사업을 일부 매각한 데 이어 영상과 백색가전 등 주력사업을 매각하기 위해 해외 유수 가전업체들과 접촉중이다.
현재 잠재 매수자들로부터 인수제안서를 제출받아 이달 말까지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해 매각협상을 벌일 계획이어서 늦어도 내년 2월까지 어느정도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알려졌다.
장 사장은 매각을 통한 조기 경영정상화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대우자동차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매각협상에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대우전자가 하루빨리 새 주인을 맞이해 임직원들이 안정된 직장생활을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요. 하지만 해외 매각만이 대우전자의 유일한 살 길이라고 생각진 않습니다.”
장 사장은 매각협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 독자 회생도 모색할 수 있다는 점을 넌지시 내비췄다. 이는 장 사장만의 생각이 아니다. 대우전자 임직원들 대다수는 매각이 아니더라도 이른 시일내 독자 회생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
장 사장은 “올해 1000억원 이상 영업이익을 내고 내년에도 1200억∼1500억 상당의 영업이익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경영상태가 점차 호전되고 있다”며 “일부 부채를 탕감하고 출자전환 규모를 확대하는 등 어느 정도 채무조정이 이뤄진다면 홀로서기도 가능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장 사장은 인터뷰 내내 비교적 밝은 표정으로 기자의 물음에 거침없이 말문을 열어갔다. 불과 1년여 전과 비교해 볼 때 판이한 모습이다. 장 사장한테서만 느낀 것이 아니다. 요즘 대우전자 본사에 들어가보면 사무실 전체에 활기가 넘치고 임직원들을 만나도 할 얘기가 많아졌다.
“아마도 올 들어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면서 임직원들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데다 모처럼 젊은 피를 대거 수혈받아 그런 것 아닐까요.”
대우전자는 올 들어 300명 가까운 신입사원을 채용한 데 이어 앞으로도 200∼300명 정도를 추가로 채용할 예정이다. 회사의 조기 정상화를 달성하고 디지털 멀티미디어 전문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첨단 디지털 제품을 개발하는 것 못지 않게 인재육성이 중요하다는 게 장 사장의 경영방침이다.
한 직원에게 장 사장에 대한 프로필을 부탁하자 그는 ‘대우전자의 재건에 사활을 건 영원한 대우맨’이라는 제목을 달아 기자에게 자료를 건네줬다.
사실 지난 76년 (주)대우에 입사해 10여년을 근무한 후 87년 대우전자로 옮겨 지금까지 무려 25년간 대우맨으로 살아오면서 그룹의 흥망성쇠를 지켜 본 장 사장은 최근 2년 동안 대우전자의 재건을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왔다.
그의 이 같은 열정에 노조도 감동, 얼마전에는 노사가 한자리에 모여 신노사공동결의문을 선언하고 화합을 다지는 패밀리데이 행사를 갖는 등 장 사장에게 전폭적인 힘을 실어줬다.
대우전자의 경영정상화가 하루 속히 이뤄져 장 사장이 취미인 바둑과 독서를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길 기대해 본다.
<>약력
△43년 서울 출생 △71년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 76년 (주)대우 기획조정실 입사 △82년 대우 바그다드 지사장 △87년 대우전자 전기사업본부 수출담당 이사 △92년 전자레인지 사업부장 △97년 가전사업부문장 △98년 부사장 △99년 9월∼2001년 10월 현재 대우전자 대표이사 사장
<김종윤기자 jy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