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로 위기를 정면 돌파하자.’
경기침체, 금융경색, 테러와의 전쟁 등 잇따른 악재로 사면초가에 몰린 벤처업계가 M&A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경기전망이 지극히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젠 M&A를 통해서라도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급증하는 매물=“우리 회사 좀 사주세요.” SI업체인 A사는 최근 한계상황으로 내몰렸다. 경기침체가 가속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일부 영업전선에서 저가경쟁에 밀려 설자리를 잃은 까닭이다. 2차펀딩 실패로 자금사정이 꼬이기 시작한 것도 오래전의 일이다. A사는 이에 따라 더이상의 비즈니스를 포기하고 비교적 현금사정이 좋은 관련업체를 대상으로 M&A를 추진하고 있다.
최근 경기침체가 가속화하고 있는데다 미 테러 및 보복전쟁의 여파로 금융시장이 얼어붙으면서 회사를 내다파려는 벤처기업이 크게 늘고 있다. 특히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창업 후 외부자금조달에 실패한 신생기업들이 M&A 매물의 주류를 형성했으나 최근엔 1, 2차 펀딩기업까지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해 잇따라 매물로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매물 벤처기업 사장은 코스닥 등록 전후에 자금력을 확보한 기업을 대상으로 피M&A를 요청하고 있으며, 자금력이 있다고 소문난 기업을 찾는 벤처기업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인컴아이엔씨 임민수 사장은 “여러 사업부를 통해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기업들이 인수제의를 해와 현재 30개 기업 자료가 쌓여있다”고 전했다. 드림원의 황지윤 사장도 “최근엔 많은 경우엔 하루 3개사까지 인수 제의가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버림받는 닷컴=벤처캐피털업체 B사장은 요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인터넷 바람, 즉 ‘닷컴붐’이 절정에 달하던 지난 99년∼2000년 사이 분위기에 편승해 묻지마식으로 투자한 수십개의 닷컴벤처 중 본궤도에 올라 IPO가 가능한 곳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상당수 벤처기업은 앞날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B사장은 어쩔 수 없이 제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투자기업 중 일부를 손실처리할 생각을 굳혔다.
코스닥 침체로 벤처자금시장 선순환의 고리가 끊기면서 현금유동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벤처캐피털들이 투자기업 중 회생 가능성이 희박한 벤처에 대한 정리작업에 들어갔다. 업계 추산으로는 연말결산을 앞두고 닷컴을 중심으로 벤처캐피털이 투자한 벤처기업 중 적지 않은 수가 ‘사형선고’를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이들 버림받는 닷컴기업은 일단 M&A시장에 매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자금력있는 기업에 인수되거나 인수기업과의 시너지 효과를 통해 수익모델을 창출, 벼랑끝에서 살아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 기회다=‘자의반 타의반’ 한계상황으로 내몰리는 업체들이 대거 M&A시장에 매물로 출현하면서 M&A 전문회사나 M&A 중개업체들은 요즘 부쩍 바빠졌다. 매물로 등장하는 벤처들이 양에 비해 질은 많이 떨어지지만 잘만 고르면 적지 않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그동안 ‘팔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사자’세력이 최근들어 늘어나기 시작, M&A딜이 성사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자세력을 대표하는 곳은 연간매출 500억∼1000억원대의 중견기업들로 유동성이 비교적 좋은 코스닥내 우량 기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자금은 있으나 미래 주력 아이템을 찾지 못한 우량 굴뚝기업들도 진흙속에서 진주를 찾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KTB네트워크·무한기술투자·한국기술투자·지식과창조벤처투자·LG벤처투자 등 벤처캐피털도 M&A를 난국돌파의 주무기로 삼으려는 태세다. 투자기업간 또는 투자기업과 외부기업간 M&A를 추진함으로써 투자자본을 회수할 수 있고 정리대상기업의 회생을 통해 원금의 일부라도 건질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다.
◇변수는 없나=벤처 M&A시장이 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현재로선 변수도 적지 않다. M&A 전문회사나 벤처캐피털 등의 관계자들은 “매물은 넘쳐나지만 업체 현황을 분석해 보면 딱히 쓸 만한 기업을 찾기 어렵다”고 한결같이 지적한다.
사자와 팔자간의 가격차가 큰 것도 문제다. 오랜 벤처분위기 침체로 벤처기업인의 기대치가 낮아져 벤처버블이 어느 정도 걷혔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M&A시장에 출현하는 벤처기업들의 가치가 높게 형성돼 있기 때문. 반면 인수를 추진하는 기업들은 이 참에 헐값에 벤처기업을 인수하려는 욕심이 지나쳐 가격의 괴리를 극복하기 여려운 상황이다.
사회적, 제도적인 문제도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M&A에 대한 인식 자체가 ‘기업사냥’으로 분류될 만큼 정서가 아직 부정적인데다 △주식맞교환(스와핑)에 따르는 세금문제 △과도한 주식매수청구 △합병 비율시 적용 주가 △막대한 M&A비용 등 복잡한 난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삼성증권 박재선 애널리스트는 “현금을 많이 확보한 기업들은 지금같은 불황기에 오히려 경쟁사를 인수하거나 필요한 사업부문을 저가에 인수, 향후 고성장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고 피인수기업들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벤처재도약을 위해 M&A시장의 건전한 육성과 활성화를 위한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중배기자 jblee@etnews.co.kr
김승규기자 se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