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 바투타 여행기
이븐 바투타 지음/창작과 비평사 펴냄
얼마전 ‘이븐 바투타 여행기(이하 여행기)’가 유명 벤처업체 대표이사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봤다. 이 책이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기획자인 그의 책상에 놓여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각 문화권의 신화·종교·전쟁 등에 대한 지식은 기획자의 기본 소양이다. 같은 제품이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문화권마다 다르다. 이 책을 통해 이슬람권에 맞는 제품을 개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답했다. 14세기 한 이슬람 지식인의 여행기가 21세기 어느 기획자의 정신적 자산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중세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1304∼1368)가 22살 때부터 무려 30년 동안 10만㎞를 여행한 기록이다. 현재의 모로코왕국 탕헤르에서 태어나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그가 처음 여행에 나선 계기는 메카 성지순례였다. 하지만 여행 도정에서 이슬람문명에 대한 탐구욕이 불타오르며 메카에서 바그다드로 돌아가는 이라크순례단에 합류, 인류사에 남을 여행의 지평을 열었다.
바투타의 여행은 북아프리카에서 중앙아시아·인도·중국(25년간의 아시아여행), 이베리아반도·마라케시(2년간의 유럽여행), 사하라사막·내륙아프리카(3년간의 아프리카여행) 등 ‘당시의 세계’를 거의 망라하고 있다. 특히 사하라사막의 횡단에 이은 내륙아프리카까지 왕복여행은 그 이후에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모험이었다.
바투타의 긴 여행은 아프리카 여행중 내려진 술탄의 명령에 의해 그가 귀향한 뒤 2년 만에 기록됐다. 아쉽게도 원본은 소실됐으나 당대의 명문장가인 이븐 주자이가 여행기를 요약, 필사했고 그것이 1808년 발견돼 여러 언어로 번역 출간되기 시작했다.
이 방대한 여행기가 담고 있는 내용은 3대륙에서 보고 들은 ‘온갖’ 것들이다. 이슬람문명 전반과 각 지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이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또 전설이나 신비담도 곳곳에 담겨 있는데 바투타는 별다른 의심없이 진지하게 기록했다.
또 법관이 매맞는 아내를 데리고 남편을 찾아가 아내를 존중하게 하는 이야기부터 ‘(면옷에 비해 흔한) 비단은 중국에서 구차한 사람들의 옷감이다’ 등 당시 사회상에 대해 전혀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이븐 바투타의 대장정이 가능했던 데는 그의 모험심과 용기 이상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슬람 특유의 형제애와 신비주의 수피교단이 이슬람세계 곳곳에 세웠던 자위야라는 수행도장의 존재다. 모든 무슬림은 형제라는 의식이 어디를 가든 당시 3대륙을 누비던 아랍대상들의 도움을 쉽게 받게 했던 것이다. 오늘날 빈 라덴에 대한 이슬람세계의 자연스런 지지와 강고한 거점의 뿌리가 이미 700년 이상된 확고한 전통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중세에 이미 ‘세계인’이 존재했고 그것은 무슬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쉽게도 이븐 바투타의 아시아 여정은 원나라 말기의 혼란 때문에 중국에서 멈췄다. 고려에 관한 대목이 있었다면 이 책은 더 일찍 소개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븐 바투타 여행기의 번역은 우리 번역사에서도 한 사건이라 할 만하다. 이븐 할둔의 ‘이슬람사상’이 번역된 바 있지만 직접 아랍어를 저본으로 번역된 이슬람 문화권의 명저는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이책의 소개는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문화적 관심에서 가장 거리가 먼 이슬람 문명권의 저서가 지난 9월의 미국 테러사건이 없었다면 독자의 관심권에 진입하기 쉬웠을까. 역사이래 다른 문명과 조우하게 되는 가장 전형적인 경로는 전쟁인데 21세기에도 달라진 것은 없는 듯하다.
번역자인 정수일 선생은 중국 옌볜에서 출생, 평양에서 교수를 지내고 한국에 와서 박사학위를 받은 특이한 경력을 가졌다.
최고의 이슬람 전문가답게 그는 이 명저에 1619개의 친절하고 수준높은 주석과 여행그림을 덧붙임으로써 독자를 감동케 한다. 번역자 스스로 세계수준의 번역에 도전했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있다. 아랍지역에 평화가 와서 번역자 정수일 선생이 이끄는 이븐 바투타 여행지 답사단에 끼어 위대한 여행가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이븐 바투타 모험게임’을 아랍인이 즐기는 광경을 여행기로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
<김덕우 모닝365 대표이사 dwkim@morning365.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