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게임산업은 70년대말 스페이스 임베이더, 갤러그와 같은 일본산 아케이드(전자오락실용) 게임기들이 유통되면서 시작됐다. 이어 80년대 후반 가정용 게임기, 90년대 초반 PC 패키지, 90년대 후반 온라인 게임 등으로 확대됐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한국의 게임산업은 2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한국게임제작협회 김정률 회장(49세)이 게임업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지난 79년 말께다. 올해로 22년째 아케이드 게임이라는 한 우물을 판 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 회장을 게임업계의 산증인, 아케이드업계의 대부라 부른다.
“우연히 게임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벌써 22년이 됐습니다. 특별히 이루어낸 일도 없는데 시간만 흘러 벌써 원로 소리를 들으니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이같은 술회와 달리 김 회장은 게임산업의 지형을 바꾸어 놓는 대업을 많이 이뤄놓았다. 게임업계의 1세대로서 아케이드 게임이 하나의 산업으로 커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현재 대표 이사직을 맡고 있는 이상철 사장과 공동창업한 어뮤즈월드를 아케이드업계의 수위 업체로 키워 놓았다. 국내 최고의 댄스 시뮬레이션 게임기 ‘EZ2댄서’를 비롯해 경품 게임기 ‘해피자이로’, 최근 선보일 골프 스윙연습기 ‘EZ2골프’ 등 히트작을 연달아 내놓으면서 국산 아케이드 게임기의 위상을 한껏 높여 놓았다.
또 한국의 다른 아케이드 업체들보다도 먼저 해외시장을 개척해 아케이드 게임이 수출 주력상품이 되는데 일조한 이도 그다. 김 회장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92년 게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산업포장(1000만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 회장이 아케이드업계에서 성공한 CEO에만 머물렀다면 업계의 원로 대접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아케이드업계의 대부’라는 칭호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김 회장이 게임업계의 궂은 일을 도맡아하는 대부 역할을 시작한 것은 지난 93년 한국게임제작협회를 창립하면서부터다.
“게임산업이 디지털콘텐츠의 핵심으로 국가적인 지원을 받는 요즘도 각종 규제가 많은데 아케이드 게임을 사행성 오락으로 치부했던 당시로서는 업계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할 말이 많았습니다. 아케이드업계의 이익과 산업 발전을 위해 협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지만 실제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목소리 크고 성격 급한 제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습니다.”
94년 3월 문화관광부 산하단체로 승인을 받으면서 김 회장은 가장 먼저 게임산업의 발전을 가로 막고 있는 법과 제도의 개선에 앞장섰다. 주무부서인 문화부와 의견이 다를 때에는 다른 협회와 연합전선을 구축해 밀고 나갔다. 그래도 밀리면 업계 전체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를 관철했다. 김 회장의 파워는 올해 음반비디오물 및 게임물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는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올 2월 당시 국회는 기존 아케이드업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관광게임장 신설을 추진했다. 김 회장은 한컴산 등 6개 게임단체와 공동으로 관광게임장 신설 저지에 나섰고 결국 국회는 입법화를 포기했다.
이런 정황 때문에 김 회장은 ‘독불장군’ ‘빅 마우스’라는 비난도 자주 받는다. 일단 목표를 정하면 앞뒤 좌우를 보지 않고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기 때문이다.
“93년 3월 29일 창립을 했으니 협회도 벌써 8년째를 맞습니다. 그동안 회원사를 중심으로 권익 향상에 앞장 서왔다고 자부합니다. 앞으로는 시야를 해외로 넓혀 국제적 단체로 우뚝서게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에는 게임과 관련된 협회가 난립되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게임산업 발전을 위해 업계가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내 게임산업 발전을 위해서라도 분산되어 있는 협회 통합운동에 전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앞으로 많은 격려와 충고 부탁드립니다.”
김 회장은 “장사꾼으로 어느 정도 성공했으니 이제는 업계의 원로로서 후진들에게 기회를 열어 주고 후견인 역할을 해야 할 때”라며 협회를 통한 후방 지원이 자신의 남은 역할이라고 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김 회장은 공동창업한 어뮤즈월드의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다.
“ 한 분야에만 22년 매달렸으니 이제 그만 쉬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동안의 발자취를 뒤로 하고 조용히 물러나야 하는 게 인생사입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 일을 필생의 과제로 만들어 내고 싶었습니다.” 세계적인 게임 전시회 개최와 게임 역사관의 건립이라는 두 가지 일을 마지막 과제로 삼아 기필코 이뤄내겠다는 각오다.
특히 김 회장은 올해 12월초 열리는 대한민국게임대전을 반드시 국제적인 행사로 치뤄내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게임대전의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문화관광부, 전자신문, 스포츠조선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게임쇼인 만큼 국내 최대는 물론 세계 4대 게임 전시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협회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22년의 노하우와 국내외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대한민국게임대전을 미국의 E3, 일본의 도쿄게임쇼, 영국의 ECTS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게임쇼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김 회장은 전시부스 600여개에 세계 20여개국 100개 업체들이 온오프라인을 망라한 게임을 전시해 3000여명의 바이어와 10만여명의 참관객들이 운집하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오는 12월7일 서울 COEX 태평양관에 가면 게임업계 대부의 ‘필생의 역작’을 만날 수 있다.
<이창희기자 changhlee@etnews.co.kr>
△53년 전남 해남 출생 △72년 서울 고려대 사대부속고등학교 졸업 △74년 일본 국제고등기술전문학교 졸업 △77년 일본 千代田工業技術專門大學 졸업 △85년 윈디얼 대표이사 △98년 연세대 행정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94년 사단법인 한국게임제작협회 회장 △96년 월간「어뮤즈월드」편집발행인 △97년 어뮤즈월드 회장 △2000년 Y.T.T 대표이사, 한국게임제작업협동조합 이사장 △2001년 대한민국 게임대전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