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구소련 국영방송국 오스킨티노의 허름한 창고에서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엄청난 물량의 보물(?)이 쏟아져 나왔다.
세기적 첼리스트 다닐 샤프란, ‘피아노계의 신성’으로 불린 슈마 리히터, 전설적 지휘자 므라빈스키 등 한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하는 러시아의 명연주자들의 음원이, 그것도 무려 40만시간 분량이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그로부터 4년만인 2001년 10월.
이 보물은 오스킨티노에 의해 디지털로 복원되더니 아시아판권을 사들인 예당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우리곁에 바짝 다가왔다. 예당은 이 가운데 엄선된 곡을 담은 10종의 음반 ‘러시아의 명연주자들’을 선보였다. 일반인의 귀도 번쩍 뜨이게 할 작품은 샤프란이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샤프란은 서방으로 망명하지 않고 끝까지 조국에 남아 구소련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신비의 성자’답게 이 음반을 통해 서정적이면서도 밝고 맑은 음색을 유려하게 뿜어낸다.
음반에 수록된 대표곡 슈만의 ‘꿈’은 간단한 멜로디이지만 어린시절을 반추하게 하는 아름다운 선율이 돋보이고 쇼팽의 ‘녹턴’은 첼로로 듣는 새로운 음악적 감동을 선사한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평가받는 리히터의 연주음반은 격렬함과 섬세함이 공존하면서도 작품에 정신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투명하고 맑은 음색을 발산한다.
수록곡 가운데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가 지난 97년 타계하기까지 전세계 공연에서 가는 곳마다 공연매진사례를 기록케 한 그의 신화를 다시금 느끼게 한다.
소련 바이올린계를 대표하는 레오니드 코간의 연주음반은 브람스와 드뷔시의 곡을 테마로 삼고 있다.
이 가운데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1번’은 헝가리 집시음악의 멋이 한껏 녹아 있으며 ‘잃어버린노래 2’는 ‘거리에 비가 내리듯’이라는 가사에 충실하듯 약간은 쓸쓸하고 우울하면서도 결코 어둡지 않은 향을 풍긴다.
이뿐만이 아니다.
소년시절 키신이 연주한 음반은 물론 구소련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한 유리 테미리카노프가 지휘한 곡을 담은 작품 등 음악사에 길이 남을 연주자들의 작품도 눈에 띈다.
예당은 이 음반이 복원실황연주이긴 하지만 구소련 보안위원회(KGB)가 반체제 인사의 도청을 목적으로 개발한 잡음제거기술이 채택돼 있기 때문에 최고급 CD음질에 버금간다고 설명한다.
예당의 김은영 클래식팀장은 “지난 30년 이상 오스킨티노의 창고에 보관돼 오던 이 음원들은 일부가 사회주의체제 붕괴이후 음원관리 소홀로 이리저리 팔려나가긴 했지만 이처럼 체계적으로 복원돼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신영복기자 yb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