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31)요람일기(중)

○1904년 6월 3일

 ▲원산 전보사 전보-【하오 두 시경에 문천(文川)읍 등지에서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교전하여 러시아 군인 여섯 명이 살해되었다고 함. 러시아 기병 38명이 어제 오전 12시경 영흥(永興)에 진주하고 지금은 고원(高原)에 도달했다고 하니, 러시아군이 원산에 입항하여 전보사로 침입할 기미가 보이면 부득불 잠시 피신코자 하오니 하촉 바람.】

 ▲통신원 지시-【부득불 피신하게 되면 사안에 따라 통신원에서 조치하려니와 비록 부근 촌락이라도 시설하여 통신 사무는 정지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그쪽 형편을 듣는 대로 즉시 보고할 것.】

 

 ○1904년 6월 4일

 ▲함흥 전보사 전보-【음력 4월 17일(양력 5월 31일) 오전 3시경에 러시아군 31명이 함흥 전보사에 진입하여 제반 통신용 장비를 몰수하고 소각하므로 전신기 1좌와 중요 문서를 다른 곳으로 숨겨 두었더니, 러시아 군인이 관찰사를 찾아가 통신기와 문서를 은닉한 전보주사를 체포해 달라고 강요함. 순검과 포졸을 풀어 전보주사 등을 사방으로 수색하다가 직원 2명을 붙들어 무수히 두들겨 패어 사경에 이르게 된지라, 할 수 없이 직원들이 기계 둔 데를 알려 주었는데 직원 2명은 금일 총살한다고 하니 생명을 어찌 부지할지 하촉 바람.】

 ▲통신원 지시-【전보를 본즉 참으로 놀랍고 탄식할 일이라. 그 형편에 따라 조치할 터이나, 부근 마을 개인 집에라도 통신기를 시설하여 통신 사무는 정지되지 않도록 할 것.】

 ▲평양 전보사 전보-【평양 전보사의 사무실은 단 두 칸 방인데 이 두 칸 방을 일본군 전신대에서 또 빌려 쓰겠다고 하오니 할 수 없이 본사 남쪽에 방 3칸과 창고 3칸을 변변치 못하게나마 속히 건축하여 이 인원이 살며 물건도 쌓아 두게 하려 하오니 하촉 바람.】

 ▲통신원 지시-【귀사 관원이 현재 살고 있는 방은 빌려주지 말고 그네들이 거처할 방을 신축 또는 수리하여 제공토록 하고, 창고는 짓지 말되 이 비용은 상부에 상세히 보고하여 변제토록 할 것.】

 

 ○ 1904년 6월 6일

 ▲정주(定州) 우편사 전보-【이 달 3일에 정주 주둔 일본 병참사령관이 일본군 병원을 정주 우편사로 옮길 뜻을 가지고 여러 차례 말해 왔기에 통신원에서 말하기 전에는 허락할 수 없음을 누차 설명했으나 끝내 듣지 않고 본사에 입주하여서 부득이 이웃 우체부 자택 말박 만한 좁은 방에서 사무를 보고 있음. 방이 좁아 무릎을 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우체부들도 사방으로 산재해서 장차 사무를 중지할 지경인데 일본군 교방청이 무릎을 펼 만 하온 즉 약간 수리한다 해도 백원은 들어갈 것이고 이에 대한 명세표는 추후에 보고하겠사오니 해산하지 않도록 하촉 바람.】

 ▲통신원 지시-【부득이 사무를 못 볼 지경이면 다른 곳으로 갈 것이나, 말하는 교방청을 일 백원 한정하고 수리해서 있도록 할 것.】

 ▲부산 전보사 전보-【일본군에 종군하는 한국인이 발송하는 우편물에 군사우편이란 인장만 찍어 일본 우편국에서 한국측 부산 우체사에 송치하면서 무료 우편으로 배달할 것을 요구하기에 우체총사에 질문하였더니 규정 밖의 일이므로 불가하다하여 그들 서신에 미납료를 부쳐서 본 항에 거주하는 박회연(朴晦然) 처소에 가서 군사우편 서신을 전해 주는데, 그 박가 부자가 군사우편에 미납료를 징수하는 법은 만국장정에도 없는 법이니 못 주겠다며 우체부를 욕하고 때린 후 그 서신을 빼앗고 미납료도 주지 않기에 이 사실을 재판소에 조회해서 변제 받았사오니 하촉 바람.】

 ▲북청 전보사 전보-【지난달 상오 2시경에 러시아 기마병 20여명이 북청 전보사에 와서 러시아 전보는 어느 나라 소관이며 일본 군대는 어디에 진을 치고 있는지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다 하며, 그 병정이 계속 와서 위협하므로 부득이 함흥으로 피신하여 소식을 들은 즉 다 물러갔다 하옵니다. 하지만 전선은 끊어버렸다 하온데 아직 보수는 못하였사오니 본사로 돌아가는 대로 형편을 다시 보고하겠나이다.】

 

 ○ 1904년 6월 15일

 ▲원산 전보사 전보-【지난 5월 28일에 러시아군 전신대 30여명이 경성(鏡城) 전보사에 침입하여 전선과 애자 등 각종 집물을 탈취하였고, 경성 이북 지역으로 통신선을 가설하는 한편 전보사장을 축출하려 하옵기에 죽기로 저항하자 총검을 들이대며 위협하였음. 이로 인해 부득이 문서류도 못 가지고 단신 도망하여 목선을 타고 어제 저녁에 원산에 돌아왔으나 막중한 공문서를 보기만 하면서 못 가지고 와서 죄송 하온데, 즉시 상경 하온지 하시 복망이라.】

 

 러일전쟁 당시의 통신피탈 상황을 기록한 김철영의 ‘요람일기’는 100년 전의 상황을 현재 상황으로 느껴질 정도로 적나라하게 전해 주고 있다. 힘없는 대한제국 정보통신인들의 애환을 하나하나 되살려 현실처럼 느끼게 해 주고있다.

 자신들의 업무를 완수하다가 러시아 군인에 의해 무수히 두들겨 맞아 사경에 이르게 되고, 급기야 총살을 당해야 하는 당시의 정보통신인들의 안타까움이 손에 잡힐듯 느끼게 한다. 무릎을 펼 수도 없는 말박 만한 작은 방에서도 처절하게 자신들이 맡은 정보통신 업무를 수행해야 했던 그들의 아픔이 세계 선진 수준에 있는 현재 우리나라 정보통신 사업의 기본 바탕이 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특히, 부근 촌락에서라도 시설하여 통신 사무는 정지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부근 마을 개인 집에라도 통신기를 시설하여 통신 사무는 정지되지 않도록 하라는 통신원의 지시는 정보통신 매체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징표로, 현재의 정보통신에 대한 중요성만큼 당시에도 중요한 가치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당시 정보통신을 운영하던 사람들은 매우 우수한 능력을 가진 인력들이었다. 일반인들과는 달리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근무지 부근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칠 만큼 지방의 통신인들도 우수한 인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당시의 정보통신인들은 일본인들에 의한 정보통신 시설의 피탈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항거했다. 일선의 전보사 직원은 물론, 중앙에서도 강력한 저항 운동을 벌였다. 철저한 반일 주의자였던 요람일기를 지은 김철영 등이 주축이 되어 강경하게 항의하였고, 뜻을 이루지 못하자 통신원 총판 민상호(閔商鎬)는 1904년 2월 16일에 이르러 그 직을 사임함으로써 일본의 불법적인 통신피탈에 항거하였다.

 1900년 3월 통신원 창설이래 총판의 자리를 지켜 오던 민상호의 사임은 당시 통신인들이 일본의 불법행위에 맞선 항쟁의식이 얼마나 강렬하였는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민상호의 후임으로 1904년 2월 24일에 이하영(李夏榮)이 임명되었으나 통신업무의 중요성 때문에 민상호는 다시 복직하게 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유리한 전세를 바탕으로 1904년 2월 22일, 우리 정부로 하여금 이른바 ‘한일의정서’에 강제로 조인케 하였는데, 그 이후 정보통신 시설에 있어서의 불법적인 행위는 더욱 가중되었다.

 이어 일본은 전신선을 절취하고 전주의 훼손을 통해 저항하는 일반 백성들을 군령으로 억압했다. 통신선로와 철도에 피해를 입히면 사형을 시키고, 마을에서 일어난 사고는 마을 사람들 전체에 책임을 물었다. 당시 일반백성들에게 정보통신 시설은 전선이 끊어지거나 전주가 잘리면 마을 사람들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하는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