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단일 경제권으로 묶여가면서 벤처캐피털시장도 국경없는 경쟁 속으로 급속히 빠져들고 있다. 이제는 해외시장에서는 물론 국내시장에서도 외국 벤처캐피털과 한판 승부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벤처캐피털 업계에는 외국 벤처캐피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글로벌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당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외국 벤처캐피털 국내 진출 급증=지난 99년 이후 주춤했던 해외 벤처캐피털들의 국내 벤처투자 시장 진출이 다시 이어지고 있으며 국내 벤처투자조합에 대한 외국 자본의 출자도 늘어나고 있다.
외국 벤처캐피털들의 국내 시장 진출은 벤처붐을 맞았던 지난 99년 전후부터 시작돼 최근까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현재 외국 자본의 참여로 세워진 벤처캐피털은 창투사로 등록하기보다는 일반법인으로 설립돼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따라 이들의 투자재원이나 투자활동에 대한 정보의 취합은 더욱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진출은 점차 국내 벤처캐피털들에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오고 있다.
현재는 국내 자본과의 매칭형태를 많이 선호하고 있지만 국내 시장에 대한 적응기간을 거친 후에는 직접진출 방식을 선호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난 9월 창투사 등록을 마친 팬아시아캐피털을 비롯해 칼라일그룹의 국내 벤처투자그룹인 칼라일테크놀러지벤처펀드아시아·일본아시아투자(JAIC) 등 그동안 국내 벤처투자 시장에 대해 관망세를 보이던 외국계 벤처캐피털들의 국내 진출이 올 하반기 이후 본격화되고 있다.
홍콩 푸루덴트아시아인베스트먼트와 피델리스인터내셔널이 40%를 출자해 국내 개인사업가(60%)와 공동설립한 팬아시아캐피털사는 지난 9월 홍콩자본으로는 처음으로 국내시장에 진출, 영업을 시작했다.
미국의 투자그룹인 칼라일도 국내 진출을 위한 시동을 걸었다. 칼라일그룹은 지난 9월 스틱IT벤처투자의 박종민 이사를 칼라일테크놀러지벤처펀드아시아 지사장으로 영입한 데 이어 현재도 투자를 담당할 수 있는 전문 벤처캐피털리스트 영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칼라일은 인력 구성이 완료되는 대로 국내 시장분석 및 투자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일본 5대 벤처캐피털 중 하나인 자익(JAIC)도 이달내에 한국 지사 설립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히카리통신벤처캐피털·자익·자프코·소프트뱅크 등 일본의 주요 벤처캐피털 대부분이 국내에 진출한 셈이다.
캐나다 몬트리올에 본사를 두고 있는 세계적 자산운용사인 CDP캐피털도 도쿄·홍콩·방콕에 이어 이달에 서울사무소를 오픈하고 본격적인 국내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CDP캐피털은 이번 한국 사무소 오픈을 위해 지난 8일 장 클로드 스크레르 회장과 장 라모드 CDP아시아인베스트먼트 사장이 방한했다. 전세계적으로 800억달러(약 105조원)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는 이 회사는 주식 및 채권·부동산·벤처 투자 등 광범위한 투자분야를 갖고 있으며 향후 3년간 한국시장의 통신·수송·에너지·물류·IT 그리고 부동산시장에 2억∼2억5000만달러를 투자할 방침이다.
이외에도 캐나다 기업인 엘파오벤처캐피털도 지난 3월 96%의 지분 출자로 오거스트타이거벤처스라는 회사를 세웠으며 지난 6월 등록을 마친 일본의 자프코도 최근 본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이와 관련, 벤처캐피털업계 한 관계자는 “외국자본 벤처캐피털들의 경우 경기불황에 관계없이 자본력과 정보력을 앞세워 국내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며 “국내 벤처캐피털들의 위축 속에 외국 자본들의 국내 벤처시장 진출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벤처캐피털 글로벌화=외국 벤처캐피털들의 국내 진출과 함께 국내 벤처캐피털들의 해외시장 성공 사례도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해외 투자에서 가장 확실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곳은 KTB네트워크다.
이 회사는 지난 90년부터 본격적인 해외시장 투자에 나서 총 31개 업체에 약 3500만달러를 투자했다. 이중 나스닥 직상장 10개, 뉴욕증시 직상장 2개, 주식교환방식 M&A에 의한 상장 6개(뉴욕증시 3개, 나스닥 3개) 등 총 18개 업체가 상장됐다.
현재 14개 업체에 대한 회수를 완료했고 4개 상장업체와 11개 비상장업체를 보유하고 있으며, 연말까지 500만달러를 추가 투자할 예정이다. 회수가 완료된 14개 업체에 대한 투자 원금은 1300만달러, 매각이익은 8800만달러에 달한다. 특히 자일랜의 경우 38만달러를 투자, 연수익률 700%가 넘는 1400만달러의 수익을 올렸으며 올해도 4개 회사에서 1500만달러(200억원) 이상의 투자수익을 거뒀다.
한국기술투자도 올해 2개 회사를 캐나다증시와 나스닥에 상장시키며 331억2000만원의 매각 이익을 챙겼다. 이중 나스닥에 상장시킨 실리콘이미지는 10억원을 투자, 32배가 넘는 324억원의 투자수익을 올렸다. 이 회사는 올해도 텔레시스(6억4800만원)·트랜스왑네트워크(3억2600만원) 등 2개사에 9억7400만원을 투자하는 등 현재 9개사, 118억여원에 달하는 투자잔액을 보유하고 있다.
LG벤처투자도 현재까지 17개 업체에 140억원을 투자했으나 엑시오커뮤니케이션즈 1개 회사만으로 100억원을 회수했다. 나머지 16개 회사도 현재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막대한 투자수익을 안겨줄 전망이다. 올해도 이같은 투자회수에 힘입어 6개 업체에 43억원의 신규 투자를 단행했다.
이같은 성공에 고무된 일부 벤처캐피털들이 해외 투자비중을 급격히 늘려 나간다는 계획을 줄줄이 내놓고 있다.
무한기술투자는 중국·미국·일본 등 해외투자에 대한 업무 역량을 집중, 향후 5년내에 해외투자비율을 50% 수준까지 끌어올리기로 했다. 또 지난 99년 베이징에 테라소스벤처캐피털을 개소한 데 이어 내년 하반기에는 홍콩지사를 설립할 예정이다. 미국의 경우 지난해 실리콘밸리에 지소를 설립한 상태로 현재 언아더월드라는 입체영상 전문 회사를 거점으로 네트워크 강화에 주력하고 있으며, 투자은행인 실리콘밸리뱅크와의 제휴를 통해 내부인력의 연수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같은 해외투자 성공사례는 업계 전체에 해외시장 진출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국내 벤처투자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더 이상 좋은 업체를 찾기 힘들다는 점과 일부 벤처캐피털들이 해외 투자분에서 막대한 수익을 거두고 있는 점에 자극을 받아서다.
외국 회사의 국내 진출 사례 및 국내 기업들의 외국 진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국내외에서 겪어야 하는 외국 벤처캐피털들과의 경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부분의 국내 벤처캐피털들은 그 영세성과 시스템적인 측면에서 외국계 벤처캐피털들과의 경쟁에 나설 수 있는 준비가 미흡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업계 전문가들은 이제 국내 벤처캐피털산업도 성장기를 지나 성숙기에 접어들어야 하는 시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홍기범기자 kbho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