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2월 21일. 일본은 대한제국 측에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해 왔다. 2월 23일 반강제적으로 체결된 ‘한일의정서’를 통해 일본은 대한제국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여 우선 보호국화하고 끝내는 식민지로 병합하기 위한 노골적 침략을 시작했다.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바탕으로 대한제국 침략방침과 대책을 정한 ‘대한시설강령 및 세목’을 작성, 한반도 침략의 기틀을 마련했다. 대한제국에 일본군대를 주둔시키고 외교권을 감독한다는 등 전 6개 항목으로 된 ‘대한시설강령’에는 정보통신 시설에 대한 강탈방안도 포함되어 있는데, ‘대한시설강령’을 기초로 하여 작성된 ‘대한시설세목’에는 정보통신 시설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피탈 방안이 포함되어 있다.
시설세목6 : 한국정부로 하여금 전신과 우편, 전화사업의 관리를 제국정부에 위탁케 한 후 공통 경제로서 이를 경영할 것. 만약 위와 같이 행해질 수 없으면 전쟁 계속 중에는 중요 선로를 골라 우리의 군용전선을 가설할 것. 경성에 있어서는 일·한 전화의 기계적 통련을 영구히 유지할 것.
정보통신의 시설과 기술은 운영권과 다른 개념이 아니다. 시설과 장비, 기술이 종속되면 운영권도 자연스럽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일본은 통신권 확보 이전에 기술과 시설을 종속시키기 위해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이를 바탕으로 1905년 4월 1일. 전문 10조로 된 ‘한일통신협정’을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결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정보통신 사업을 송두리째 일본에 넘겨주어야 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일통신협정’에 의해 대한제국의 통신행정을 전담하게 된 일본은 곧 대한제국의 통신기관 및 해당 사무를 인수하기 위해 체신서기관 이하 7명의 인수위원을 파견하여 1905년 7월 2일에 이의 인수를 완료했다. 이후 일본 체신성에 의해 인수된 458개 국소(局所)의 시설 및 업무는 식민정책의 일부로서 포함시켜 관리되었다.
이어 그해 12월에는 통감부 및 이사청(理事廳) 관제와 통감부 통신관서관제(通信官署官制)를 공포하여 대한제국 내에서의 통신행정관리기관이 일원화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1906년 1월에 설치된 통감부 통신관리국은 1910년 총독부의 설치와 함께 폐지되어 다시 조선총독부 통신국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총독부 통신국은 당초 통감부 통신관리국에서 관장하였던 업무 이외에도 구한국정부 소관의 항로표지(航路標識)·기상관측·전기사업 등을 취급했고, 1911년 4월에는 발전수력조사(發電水力調査)에 관한 사무까지 관장하여 그 기능이 매우 다양하고 컸다.
‘한일통신협정’으로 일본은 행정과 경제상에 득책이 된다는 미명을 내세워 궁내부 전화를 제외한 모든 통신사업권을 박탈하고 기존 통신사업에 관련된 토지, 건물, 기계 및 일체의 설비를 강탈했다. 정보통신기관의 확장이란 명목으로 대한제국의 토지와 건물을 마음대로 수용하고, 물자 수입에 있어서도 면세의 특권을 누렸다. 또한 정보통신기관의 운영과 관리도 어디까지나 일본이 독자적으로 행하게 되어 대한제국은 정보통신사업에 관하여 일절 외국과의 교섭권을 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겨우 싹트기 시작한 우리의 전기통신 사업은 끝내 중단되고, 그 주권마저도 상실하고 만 것이다.
‘한일통신협정’은 한반도를 강점하기 위한 일본의 단계적 선행조치의 하나였는데, ‘한일통신협정’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보다 반년이나 앞선 사실은 정보통신 사업이 곧 나라의 주권임을 인식하게 해주는 사실로, 일본의 침략야욕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협정체결로 비록 시설과 주권은 일본에 빼앗겼지만 이후에도 국민들과 관련 정보통신인들의 항거는 그치지 않아 일본이 주도하게 된 정보통신 사업의 추진을 적극 방해했다. 특히 1905년 최익현은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킴에 앞서 그동안 일본의 침략행위를 거론한 중에 전보와 우편 양사를 강제로 탈취하여 우리의 통신을 장악하였음을 그 열한번 째 죄목으로 지적, 정보통신 사업권의 반환을 강력히 요구했고, 정보통신 관련인들도 협정의 체결 반대와 체결 후에도 통신시설의 인계를 방해하는 등 통신권 사수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주변 열강의 각축전 속에 대한제국은 끝내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보통신 사업권에 이어 국가주권을 완전히 일본에 빼앗기고 말았다.
한편, 요람일기를 지은 김철영은 통신권 피탈과 시설인수 과정에서 철저한 반일행동으로 일본인들에 의해 기피 인물로 지목되었고, 1907년에는 궁내부(宮內府) 통신사에 근무하면서 고종 폐위에 대한 매일신보 호외사건 발생시 일본측의 정보를 빼돌려 언론기관에 제공한 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김철영이 체신과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한일통신협정’ 이행과정에서 자리를 옮긴 궁내부 통신사는 궁궐 내의 통신시설을 관장하던 곳으로, ‘한일통신협정’에 의해 통신권이 피탈된 때에도 특별규정을 두어 궁내부 소관으로 남겨 둔 기관이다. 그곳에 근무하던 통신인들은 정보통신의 특성상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그 정보를 당시 항일 신문이었던 대한매일신보의 베델(Bethell, Ernest T)과 민족 진영에 제공해 주곤 했다.
1907년 일본은 헤이그 밀사사건을 트집잡아 고종황제를 퇴위시키려는 공작을 꾸미고 있었다. 이것을 안 궁내부 통신사의 김철영과 직원들은 이 사실을 베델에게 알려 주었고, 베델은 호외로 이 사실을 보도, 이에 격분한 군중들이 일본 경찰과 거류민을 공격하여 30여명이 죽고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베델이 발행하던 매일신보에 고종 퇴위에 관련된 기사가 나간 후 김철영은 보안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당시 36세의 영국 언론인 베델도 일본의 영향으로 영국정부로부터 실형을 선고받고 홍콩에서 복역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복역을 마친 후 베델은 다시 우리나라로 들어와 생활하게 되지만, 1908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철영을 비롯한 궁내부 통신사 직원들은 경제난에 허덕이는 베델에게 고종황제가 제공하여 주는 자금을 전해 주는 등 막후 밀사의 역할도 수행했다. 이러한 사실이 일본군의 감시 대상이 되었고, 고종폐위에 대한 매일신보 기사로 인하여 급기야 귀양을 가야 했다. 대한제국을 위해 애쓰던 언론인 베델 또한 이국 땅에서 젊은 나이로 목숨을 잃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영국에서 발굴된 베델의 재판기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김철영이 기록으로 남긴 요람일기는 러일전쟁과 우리나라 통신피탈의 과정에 대한 기록뿐만이 아니라 당시 정보통신을 운영하던 사람들의 의식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쟁의 와중에 통신시설의 피탈과 함께 그에 대한 정보통신인들의 저항 기록과 정보통신 시설에 대한 운영자들의 인식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주축이 되고있는 정보통신의 중요성보다 한치의 적음도 없는 당시 정보통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요람일기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해 본다.
○ 1904年 4月 25日
▲ 성진 전보사 전보-【러시아 군인들의 느닷없는 습격을 당한 후 직원들은 ‘막중한 통신사무를 잠시라도 쉴 수 없다’고 판단하여 약간의 기재를 수습, 마천령(摩天嶺) 고개를 넘어 남쪽 90리의 단천(端川)으로 후퇴하여 주막에 전신기를 설치하고 4월 24일부터 통신을 재개하였음.】
▲ 통신원 지시-【여러 가지 정황을 들으니 심히 민망하나 이러한 시기에 통신은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일이니 산야(山野)를 가리지 말고 그 형편에 따라 임시로 기계를 설치하여 통신케 하라(無論山野隨其形便權設通信事)】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