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원 한국디자인진흥원장(ceo@kidp.or.kr)
가뜩이나 기울어가던 미국의 경기가 9·11 테러를 계기로 급격히 악화되면서 세계경제가 불황을 맞고 있다는 소리가 높다. 테러와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같은 불황이 장기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 속에서도 경기가 곧 바닥을 칠 것이라는 희망 섞인 기대가 살아나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경기가 나쁠 때가 바로 디자인에 투자할 호기라는 점이다. 경기란 순환적인 것이므로 불황의 끝에는 호황이 시작되는데, 그 호황기에 대비하는 수단이 디자인 투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황으로 모두 움츠리고 있을 때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해 놓으면 호황기에 높은 투자효과를 거둘 수 있다.
사실 디자인 투자는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추어 구매를 촉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호·불황에 관계없는 전천후 전략이다. 경기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디자인 투자는 매우 높은 투자대비효과(ROI:Return On Investment)를 가져다 준다. 디자인은 고도의 창의성을 생명으로 하는 지식산업이므로 상대적으로 적은 투자로도 커다란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꺼리는 불황기에 디자인에 투자를 하게 되면 그 효과가 배가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실제로 많은 기업들이 불황에도 불구하고 우수 디자인 상품을 개발해 승승장구하고 있다.
우수 디자인이 가장 효과적인 마케팅 수단이 될 수 있는 데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디자인이 뛰어난 상품은 외관과 색채가 수려해 갖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만들어 구매를 촉진시킨다. 일단 구매한 다음에는 인터페이스가 뛰어나 사용성이 높기 때문에 커다란 만족감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품을 갖고 있으면 보는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거나 찬사를 보내니 자신의 문화적 수준이 한껏 높아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니 디자인이 좋은 상품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전회사나 자동차회사 역시 우수한 디자인 능력으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키워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한 예로 국내 가전업체가 만든 휴대폰이 첨단기기의 각축장인 미국에서 선두주자인 노키아를 제치고 가장 인기 있는 제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데 수량에서는 2위지만 판매금액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이는 바로 미국인들의 니즈(needs)에 부합돼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제품개발을 통해 성능만큼이나 뛰어난 디자인으로 최고급 휴대폰 브랜드 이미지 구축에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전자제품뿐만이 아니라 자동차나 등의 경우도 디자인이 경쟁력의 핵심임이 밝혀지고 있다. 2000년 국내 굿디자인(GD) 선정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국산 자동차는 미국에서도 가장 잘 팔리는 자동차로 성가를 높이고 있다. 레저생활을 즐기기에 적합하도록 디자인된 이 자동차는 독특한 스타일로 소비자 만족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이 회사들이 이처럼 커다란 성공을 거둔 이면에는 디자인에 지속적으로 투자한 최고경영자들의 의지가 깔려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들은 모두 오래 전부터 디자인을 경영전략으로 채택하고 체계적인 ‘디자인경영시스템’을 운영함과 동시에 디자인 혁신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해 오늘날 세계적인 수준의 디자인 개발 역량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제 기업들이 디자인경영시스템 도입을 위해 적극 투자할 때다. 중국이 WTO 가입을 계기로 우리와의 격차를 계속 좁혀올텐데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바로 디자인을 통한 차별화가 우리 산업의 활로다. 특히 무한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IT산업의 경우 타사보다 우월한 차별화 요소를 위해서는 디자인을 경영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정보시대에는 디자인산업이야말로 고객 친화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창출하는 대표적인 지식산업이기 때문이다.
21세기 ‘디자인의 세기’를 시작하면서 디자인경영의 확산으로 IT산업은 물론 우리 경제 전반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오기를 기대한다.
한국디자인진흥원장 ceo@kidp.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