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말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공식 가입함으로써 향후 5년내 세계 경제지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특히 중국에 인접한 한국의 가전 및 정보통신 산업은 중국 기업의 경쟁력 강화로 인해 제3국 시장 잠식이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통신시장의 개방으로 구미 선진기업과의 치열한 경쟁은 물론 중국 통신기업의 추격이 본격화될 우려가 있다. 이처럼 황화의 거대한 물결과 함께 더욱 치열한 경쟁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글로벌 경제체제하에서 우리의 살 길은 무엇일까.
CDMA 단말기 세계최초 상용화의 교훈
세계 경제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96년 CDMA 기술의 상용화다. 지난해 12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펴낸 ‘CDMA 성공신화의 시사점(김재준 수석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CDMA 휴대폰 상용화는 국내 산학연이 손잡고 거둔 쾌거 중의 쾌거다.
CDMA 기술 상용화는 89년부터 전자통신연구소(ETRI)와 삼성·LG·현대·맥슨 등 국내 전자업체들이 참여해 특허권자인 퀄컴과 공동으로 개발한 것으로 96년까지 7년간 정부출연 연구비 543억원을 포함해 총 996억원의 개발비와 1000여명의 연구원이 투입된 대형 사업이었다.
상용화 최초 성공 이후 플립업·듀얼폴더·스마트폰·워치폰 등 새로운 제품을 속속 개발, 일부 모델은 최대시장인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전 산업분야에서 수출이 감소세로 돌아서는 가운데서도 CDMA 휴대폰 수출은 매년 30%대의 가파른 고성장세를 보여줬고 2000년 기준으로 세계 시장의 54%를 점유하기에 이르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동통신 업계의 대부로 통했던 에릭슨과 모토로라가 적자를 면치 못하며 사업을 지속적으로 축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삼성전자는 중국과 브라질, 미국 등에서 애니콜 바람을 일으키며 지난해 3분기 이후 휴대폰 분야에서 세계 4위의 메이저 기업으로 올라섰다.
원천기술 확보가 핵심이다
그러나 이처럼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CDMA 상품화라는 개가도 원천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탓에 아쉬움을 주고 있다. 퀄컴과의 공동개발이 느리게 진행되자 기초설계를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개발을 추진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진 대로 CDMA 단말기 1대당 생산가격의 6% 정도를 특허권자인 퀄컴에 고스란히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CDMA 특허를 소유한 퀄컴은 지난 95년 설립 후 92년까지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CDMA 기술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200여종에 이르는 특허권을 획득, 막대한 로열티 수입을 거두고 있다. 또 MSM(Mobile Station Modem)칩 등 핵심 부품을 직접 공급함으로써 이동통신 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2000년 매출 32억달러에 당기순이익 6억7000만달러(순이익률 21%)의 경영성과를 올렸다.
퀄컴뿐 아니라 세계 톱 전자정보통신 기업들 대부분이 원천기술 특허를 통해 막대한 로열티 수익을 거두고 있다. DVD플레이어에서는 소니·필립스·도시바가, 차세대 대형 디스플레이인 PDP는 일본의 후지쯔가, 동영상 멀티미디어 압축기술인 MPEG2 분야는 소니 등이 원천특허를 대거 장악하고 있다.
사실 원천기술 확보는 로열티 수입 외에도 이익이 엄청나다. 원천기술의 독창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특허권을 갖게 되면 차세대 제품 개발에서도 유리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GSM 방식의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노키아가 좋은 예. 노키아는 GSM 기술을 기반으로 지속적인 기술 개선을 통해 이동통신 분야의 시장지배력을 굳건히 하고 있다.
MP3플레이어-종주국의 깃발을 날리자
정보통신 분야에 CDMA가 있다면 디지털가전 분야에는 MP3플레이어가 있다. MP3플레이어는 새한정보시스템(현 엠피맨닷컴)이 97년 12월 제품개발에 성공한 후 전세계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제품이다.
당시는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어 새로운 세기의 제품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던 때. 더구나 MP3플레이어는 진정한 의미의 디지털 휴대형 기기의 장을 연 제품으로서 20세기 후반 워크맨의 신화를 이어갈 차세대 제품으로 첫 손가락에 꼽혔다.
인터넷을 통해 수분 만에 다운로드할 수 있을 정도로 압축률이 뛰어나면서도 CD에 버금가는 음질을 담고 있어 전세계 음악마니아들을 단숨에 사로잡으며 디지털 오디오 파일의 사실상 표준으로 굳어졌던 MP3.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를 PC가 아닌 휴대형 기기를 통해 재생토록 할 생각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한은 누구보다도 먼저 기술개발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8년부터 국내에서는 100곳이 넘는 벤처기업들이 MP3플레이어 산업에 가세, 기술개발과 제품출시 및 시장트렌드 선도라는 측면에서 종주국의 위치를 분명히 했다. 해외 바이어와의 공급경쟁에서 과열양상을 보이긴 했지만 결국 이같은 과정을 거쳐 경쟁력 있는 기업들을 배출해냈다.
지난해 12월 현재 국내 업체들의 MP3플레이어 생산량은 전세계 시장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휴대형 CD플레이어에 MP3 기술을 접목시킨 MP3 CD플레이어 분야에서는 소니나 필립스도 감히 넘보지 못할 아성을 구축하고 있다. 아이리버가 지난해말 출시한 세계 최대의 슬림형 MP3 CD플레이어 ‘슬림엑스’는 기존 휴대형 CD플레이어 못지 않은 안정성과 휴대성을 강점으로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아쉬움은 남는다. 기술개발은 먼저 했지만 상용화에서 미국의 소닉블루(당시 다이아몬드멀티미디어)에 선수를 뺏긴 것이다. 이같은 시장 선점의 영향으로 현재 미국 시장은 여전히 소닉블루의 아성이다. 우리 MP3업체들은 제품 상용화 6년여 만인 올해에서야 미국 시장에 자체 브랜드로 진출하게 된다.
한국무역협회가 펴낸 자료에 따르면 국내 전자정보통신 산업의 기술무역현황을 살펴보면 99년을 기준으로 기술수출규모가 1억2000만달러인 데 비해 기술수입은 14억4000만달러로 13억달러 이상의 기술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95∼99년 기간동안 누적된 기술무역적자만 50억달러에 달한다. 원천기술 부족의 여파가 얼마나 큰지를 말해주는 수치다.
LG경제연구원 조준일 연구원은 “이제는 생산이나 상품화 기술만으로는 글로벌 경쟁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며 원천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신속한 기술혁신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차별적인 경쟁우위를 확보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최근들어 다행히도 차세대 동영상 압축기술인 MPEG4와 MPEG21의 경우 LG전자와 삼성전자가 세계 표준경쟁에 나란히 참여하고 있고, 4세대 이동통신부문 연구에 정부와 기업 및 학교가 공동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CDMA와 MP3 사업의 빛과 그림자를 꼼꼼히 살펴 차세대 제품 개발에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기술로 승부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정소영기자 syjung@etnews.co.kr>
◆인터뷰: MP3플레이어 업체 엠피맨닷컴 문광수 사장
“한민족은 상당히 독창적인 민족입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많지요. 하다 못해 단점으로 지적되는 ‘빨리빨리’ 문화도 해외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짧은 시간에 신제품 개발을 완성시키는 데는 무서운 추진력이 될 수 있습니다.”
MP3플레이어 업계의 산증인이자 차세대 휴대형 디지털오디오 분야의 상징적인 인물로 꼽히는 엠피맨닷컴의 문광수 사장(58)은 우리의 장점을 살리면 글로벌 경쟁체제에서 얼마든지 싸워나갈 수 있다고 자신한다.
“특히 독창성은 필수불가결한 항목입니다. 현재는 같은 조건이라면 중국·동남아 같은 저임금 국가나 미국·일본과 같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와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길은 독창성을 살린 우리만의 제품을 만드는 것밖에 없다고 봅니다.”
사실 문 사장은 엠피맨닷컴의 전신인 새한정보시스템 시절, 어떻게 보면 성공가능성이 불투명했던 MP3플레이어 사업에 과감하게 뛰어들었을 만큼 독창적인 사업 아이템 발굴에 일가견이 있었다.
“저는 해외출장을 갈 때면 노트북에 좋아하는 MP3 노래를 담아 시간이 나면 듣곤 했습니다. 96년에 미국 출장중에 숙소에서 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이를 휴대형 뮤직 플레이어로 만들면 편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MP3플레이어는 단순하게 생각하면 MP3 파일 재생기능을 휴대형 기기에 탑재한 것으로 뭐 그리 독창적이랄 것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정을 알고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당시는 소니의 워크맨과 CD워크맨이 휴대형 오디오 플레이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던데다 MP3파일의 저작권 침해문제가 음반업계로부터 거세게 제기되던 시점이어서 시장성도 불확실해 어느 누구도 감히 선뜻 뛰어들지 못할 상황이었다. 기술적으로도 기본 기능을 구현하는 하드웨어와 PC의 파일을 전송하는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를 컨트롤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펌웨어 기술 3가지가 완벽히 조화를 이뤄야 했다.
“좋게 보면 과감했고 나쁘게 보면 무모했다고 할까요. 저작권 문제는 업계의 조율로 언젠가는 해결될텐데 마냥 기다리다가는 타임 투 마켓을 놓치겠다 싶었지요. 다행히 SI기업이었던 새한에는 뛰어난 기술자들이 많아 최적의 조건을 구비한 셈이었습니다.” 벤처와 중소기업들 대부분이 새로운 품목 발굴에 혈안이 돼 있는 이때 엠피맨이 겪었던 당시의 경험이 힘이 될 것 같다.
“새로운 품목을 상품화한다는 것은 단지 한 품목을 개발한다는 의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품으로서의 완성도와 함께 시장성 조사, 홍보, 판로개척, 자금확보, 사후관리 시스템 등 제반 활동이 적절히 동반돼야 하지요. 어차피 새로운 품목이 시장에 나온다는 것은 시행착오를 전제로 하지만 세계적인 상품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고 과연 무엇이 우리의 강점인지를 파악하는 일이 선행돼야 합니다.” 과연 21세기에 우리의 무엇이 강점으로 작용하게 될까. 신년 벽두부터 고민의 시작이다.
<정소영기자 s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