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기본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기본을 제대로 다지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현재 세계는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재편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고 있다. 단지 사용하는 상품에 그치지 않고 모든 사회 시스템의 디지털화가 진행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뒤처지는 나라는 이등국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산업혁명이 서구 열강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많은 제3세계 국가가 그들의 하청 국가로 전락한 것처럼 지금의 디지털 혁명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또 다시 열강의 눈치를 보며 나라살림을 꾸려 나가야 한다.
◇수치는 충실, 실상은 부실=우리나라는 IT산업에 국운을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보화를 강하게 추진하고 있다.
초고속정보통신망이 전국 144개 주요 도시를 거미줄처럼 연결해놓고 있으며 600만가구 이상에서 초고속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 인터넷 이용자는 2200만 가량으로 추산된다. 국민 2명 중 1명이 인터넷을 사용한다는 계산이다. 인터넷 웹사이트 증가율은 연평균 1800%다.
이동전화 사용자는 그 이상이다. 국내 이동전화 사용자는 2700만명 정도로 핀란드 등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이동전화 단말기 수출도 세계 3위권인 72억달러를 기록했다. 두말할 나위없이 메모리는 세계 최강이다.
IT산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해 국내총생산의 13% 수준에 올라섰다. 수출비중은 더 높아 30%대를 넘는다. 무역수지흑자의 일등공신인 셈이다. 이제 IT를 빼놓고 국가 경제와 수출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화려한 IT산업 수치에 비해 그 기반은 취약하다고 지적한다.
세계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IT인프라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핵심 장비는 거의 외산이고 솔루션도 수입이 주류를 이룬다. 반도체, 이동전화, PC 등이 수출 효자상품이라고 하지만 핵심 부품 및 장비의 외국 의존도는 아직 높다.
소프트웨어나 솔루션 수출은 더욱 형편없다. 지난해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솔루션 수출은 고작 2억달러 수준인 반면 수입액은 수십억달러에 이른다. 로열티까지 합치면 그 규모는 더 커진다.
이처럼 몸집불리기를 거듭해온 국내 IT산업의 취약성은 세계 동시 불황이라는 태풍을 맞아 여지없이 무너졌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IT수출이 줄어들고 IT관련 벤처기업은 줄줄이 도산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국내 IT산업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과연 IT산업의 원인은 무엇일까. 대다수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기초 부실에서 찾는다.
먼저 국가시스템 자체가 아직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당리당략으로 이전투구를 반복하는 삼류 정치는 제외하고라도 정책 마련과 이를 진행하는 시스템이 여전히 이전의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법과 제도는 아날로그의 틀에서 디지털 현실을 담아내려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디지털시대를 담을 그릇을 만들자=현재 제정중인 IT관련법 가운데 전자상거래 관련 법령의 정비는 매우 시급하다. 업계의 초점이 맞춰진 전자상거래 관련법은 전자거래기본법 개정안, 전자서명법 개정안, 온라인디지털콘텐츠산업발전법 제정안, 부가가치세법 개정안 등이다.
전자거래 관련법령 정비는 ‘전자상거래의 제도화와 이를 통한 활성화 유도’라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 계획됐지만 내용 면에서 보완점을 노정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전자거래 관련법령 체계와 관련된 기본틀의 원칙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현행 전자거래 관련법은 전자거래기본법을 모태로 삼고 있지만 전자서명법, 전자거래소비자보호법 등 관련법에 대해서도 우월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전자거래기본법의 정비가 우선돼야 한다. 현재 전자거래기본법은 전자상거래의 필수도구인 전자문서의 송수신 시기를 구체적으로 규정한 반면 전자문서의 적용 범위가 애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전자거래의 정의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현행 전자거래기본법에서는 전자거래를 재화와 용역을 주고받는 상거래에 국한하고 있다. 따라서 위임, 임치, 현상광고, 리스계약 등을 규정할 법적 근거가 없다.
온라인디지털콘텐츠산업발전법 역시 온라인콘텐츠의 정의와 한계가 모호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으며 전자서명법은 비공인인증기관에서 발급한 인증서의 법적 효력 인정 문제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부처의 이해관계와 국회의원의 실적주의로 인해 관련법률이 과잉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근본 치유책은 입법·행정체계의 근간을 쇄신하는 것이지만 우선 부처간 입장을 중재할 수 있는 조정기구가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그 기구를 법제처라고 제시한다. 법제처가 입법 과정의 조정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조정기구로 만들어야 한다. 국회의원도 정책역량 강화를 위해 민간 전문가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보화는 전략이다=기업은 앞다퉈 첨단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도입하고 있지만 이를 운용할 경영시스템이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해결책은 시스템 변화다.
작년 국내 산업계의 화두는 전통기업의 e트랜스포메이션이었다. 철강·조선·자동차 등 우리나라의 경쟁력이 높은 전략업종을 중심으로 이러한 경영혁신 노력은 다각도로 진행됐다. 그러나 노력에 비해 결과는 신통치 않다. 전략부재, 즉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기업의 경영혁신은 전산화가 아니다. 기업 전체의 시스템을 정보화와 연결해야 한다.
IT에 대한 전략적 사고는 기업의 조건과 수준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무엇보다 성공적인 IT전략은 해당기업의 사업전략과 맞아 떨어져야 가능하다. 정보화를 통해 기업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설정, 기업의 매출증대, 업무프로세스 개선을 통한 비용절감 그리고 궁극적으로 기업가치 증대를 총괄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전사적자원관리(ERP), 고객관리(CRM), 공급망관리(SCM) 등 솔루션은 홍수를 이루지만 이 솔루션 도입이 기업의 중장기적 전략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또 다른 비용낭비로 이어질 것이 자명하다.
◇교육 백년대계는 인력 양성=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교육정보화의 겨우 하드웨어 보급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지만 이를 채울 인력과 콘텐츠가 없어 그 효과가 미지수다.
범국가적 교육정보화 추진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2단계 교육정보화 종합발전계획은 무려 3조2874억4000만원이라는 대규모 예산이 잡혀있다. 그러나 문제는 장비와 인력의 불균형이 교육정보화의 발목을 잡고 있다. 장비는 디지털이지만 인력은 여전히 아날로그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다.
교육정보화의 실속을 내기 위해서는 정책결정과 집행의 전권을 행사하는 교육부가 권한을 일선 학교로 이양해야 한다.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인력 양성보다 하드웨어 확충에만 힘을 쏟는 일선 학교의 현실도 변해야 한다.
따라서 일선 학교에서 교육정보화 관련업무를 관장하고 추진할 부서를 만들어 정책과 구매 예산을 내놔야 한다. 이는 교육정보화 예산을 인력 양성과 콘텐츠 개발에 배치해야 가능하다. 크게 부족한 정보화 담당 교사도 교사에 대한 정보화 교육을 통해 충원해야 한다. 교육용 소프트웨어와 디지털 교재를 포함한 콘텐츠 개발도 중요하다.
제도적으로 교육부나 각 지역 교육청의 교육정보화 정책수립 과정에 현장 교사가 참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장동준기자 dj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