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IT산업의 심장이자 메카인 실리콘밸리에서 한인의 기상을 맘껏 펼쳐라.’
신년벽두부터 세계 IT산업의 심장인 실리콘밸리의 한인들이 다시 뭉친다. 발단이 된 것은 지난해 6월이었지만 12월에 다시 만나 가능성을 확인했고 올해부터는 이른바 ‘베이에어리어’에서 새너제이시에 걸친 실리콘밸리지역 10개 한인단체가 아예 하나로 뭉쳐 정기적으로 만난다.
‘한인IT네트워크’로 불리는 KIN(Korean IT Network)이 그동안 미국 한인사회에서 보기드물었던 특유의 한인간 협력모임을 만들고 한인휴먼네트워크의 새 장을 연 것이다.
이미 두차례의 모임을 가진 이들은 줄곧 한인들이 IT를 매개체로 다시 모이게 된 감흥과 향후 협력방안을 화두로 삼아 미래를 향해 내닫게 된다.
이르면 올 4월부터, 늦으면 내년 하반기에나 경기가 회복되리라는 전망속에서 이들은 예년과는 다른 활기속에 새해를 맞았다.
사실 지난 1년간 IT심장인 실리콘밸리에서 닷컴위기로 시작된 세계 경기의 침체는 9·11 뉴욕 테러사태 이후 최악을 기록했다.
이런 가운데 한인IT기업인들의 모습은 새로운 봄을 위해 힘을 온축하고 있다.
이들이 만든 것은 이미 인도인과 중국인이 이미 20여년전에 스스로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구축했던 그 휴먼네트워크의 첫단추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볼 때 휴먼네트워크는 일견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실리콘밸리의 IT벤처생태계에서는 ‘알파요 오메가’다.
그동안 실리콘밸리의 한국인은 인도인과 중국인에 비해 압도적 소수(minority)였다. 잘 분석해 보면 그들이 강하게 발언권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만의 휴먼네트워크의 힘, 즉 민족의 단결력에 기인했음을 알게 된다.
실리콘밸리에서 주중 어느 때라도 열릴 수 있는 세미나토론회에서 인도인과 중국인들은 실리콘밸리의 거물투자가와 거물기업인을 부른다.
원하는 모임에 인텔의 앤디 글로브 회장이나 전설적 벤처캐피털리스트인 클라이너퍼킨스(KP)사의 존 도어 그리고 짐 클라크나 래리 엘리슨도 불러들일 수 있다. 이들은 함께 실리콘밸리의 미래를 논하고 재정적·기술적 문제와 IT산업의 향방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왜 그것이 가능한가.
그들은 이미 ‘India·China’의 약어인 ‘IC’라고 부르면 통할 정도로 자신들만의 굵고 실한 휴먼네트워크를 통해 거물에게 걸맞은 영향력있는 기술자, 투자가, 마케팅전문가까지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한인벤처인들도 그간 실리콘밸리를 개척하면서 가장 소홀했던 이 부분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선주민 한인벤처기업인과 후발 한인벤처인들이 함께 가꿔갈 본격적인 벤처생태계의 생성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세계 첨단산업의 심장에서 한인들도 인도·중국 및 미국의 세계적 IT거물과 교유하고 입지를 세울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한인벤처인들이 휴먼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은 한인들만의 휴먼네크워크는 물론 현지인과의 보다 활발한 휴먼네크워크를 하자는 이유에서다.
“실리콘밸리의 문화를 이해하고 국적이야 어찌됐든 현지 사정을 잘아는 벤처캐피털, 기술자, 마케팅 전문가와 제휴하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하와이 이민 2세 한국인은 이렇게 충고했다.
그는 세계적 컴퓨터 제조업체인 에이서에서 근무하면서 미국 대학서 함께 공부하던 한국인 조현진씨와 인도인 엔지니어인 싯달타 로이를 만났고 의기투합해 i파크에 둥지를 틀었다.
“이곳 실리콘밸리에선 전략적 파트너를 찾아 협력하거나 내기술과 고객기술에 대해 잘 알고 마케팅을 해결해 주거나, 기술적 제휴로 제품가능성을 높여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마케팅을 맡은 그는 사전 고객수요조사 등을 통해 인도인 개발자에게 방향을 제시한다. 엔지니어인 그 역시 마케팅에 대해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대만의 컴퓨터회사 에이서에서 만나 의기투합해 벤처를 세웠다는 그들은 재직 당시 쌓은 인맥으로 마케팅, 펀딩, 세일즈가 가능하다고 한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벤처란 가장 좋은 인력으로 팀을 구성한 회사라는 게 현지의 정설이다.
i파크의 콰르테트란 이 회사가 매출 한푼 못내고도 가장 성공한 벤처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가 저절로 나온다.
또 하나 실리콘밸리에서의 성공은 명함케이스인 ‘롤러덱스’가 두껍고 가치있는 사람들로 채워졌느냐는 점이다. 성공한 벤처의 요건에는 명함상자인 롤러덱스 여러 개에, 충분할 만큼 넉넉한 휴먼네트워크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가부터 찾아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경기침체로 4월이나 돼야 회복의 싹이라도 찾아볼 수 있으리란 분위기인데도 누구도 섣불리 실리콘밸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스탠퍼드대학 교환교수로 DB를 강의하는 차상균 교수는 “하이테크가 살아있고 엔지니어가 있고, 전후방 연계효과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게다가 벤처캐피털리스트들도 여전히 살아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이같은 가능성의 땅에서 휴먼네트워크를 구성하면서 또하나 되새겨야 할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하려는 기업들은 이제 훌륭한 기술 하나만을 무기로 성공하려는 자세를 바꿔 보다 적극적인 방향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현지인들의 설명은 간단하다.
탁월한 기술만으로 성공할 수 있다면 한국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기술 바탕의 종합비즈니스만이 통하는 곳이 실리콘밸리인 것이다.
이곳에선 기술개발단계에서 마케팅을 통해 시장조사결과까지 반영한 후 이를 피드백해 제품설계후 고객에게 내놓아야 하는 게 상식이다. 이를 확고히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현지의 인맥, 자본을 결합해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실마리를 쥐어주는 것이 ‘롤러덱스’인 것이다.
지난해까지 이어지면서 최악을 기록하던 실리콘밸리는 연말이 되면서 다소 살아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한인벤처들이 입주해 있는 실리콘밸리 남쪽 서니베일의 몬테큐거리 노스퍼스트가에는 차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지난 99년 겨울 거리를 꽉 메우던 차들이 1년만에 거의 보기 힘들 정도였지만 이제는 제법 차들이 다닐 정도로 인구 이동 증가세가 눈에 띈다고 한다.
노스퍼스트가에 자리잡은 한인벤처지원센터인 i파크의 한국인들은 이를 보면서 2002년 한해의 각오를 새로이 한다.
지난해 실리콘밸리 진출 1년도 안된 새내기 벤처들의 모습은 서투르고 다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현지에 와서 실리콘밸리 문화체험(?)에 비싼 수업료를 물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여전히 똑같은 상황으로 입주해서 개발 이후 마케팅에 대한 대안없이 제품성능에만 기대는 기업이 나와서도 안된다.
오직 새로운 시장개척의 가능성, 준비된 마케팅과 펀딩전략을 갖춘 기업들에만 성공가능성이 주어진다는 것이 현지인들의 한결같은 조언이다.
최근 정부가 설립한 한인벤처보육센터격인 ‘i파크’의 전략도 바뀌고 있다.
현지에 와서 연구개발을 하려는 것에 대한 자성론에 기반한 것이다.
세계 최고의 비용을 줘야 하는 연구개발인력이 있는 곳인 만큼 목적의식있는 연구협력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이를 인식한 정부도 i파크의 지원방향을 마케팅으로 전환했다. 40개 업체가 입주해 있는 이 건물에서 매출을 기록한 회사는 3∼4개 정도라고 한다. 소문에는 지난해 약 300만∼400만달러도 기록한 회사가 있는 등 성공가능성을 보이는 회사가 몇몇 등장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 i파크도 마케팅 중심의 기능으로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99년 4월 만들어져 1년여만인 지난해 6월 연구개발 중심에서 마케팅지원 중심의 실리콘전진기지로 탈바꿈하는 노력을 진행중이다. 연구개발 중심으로 이뤄져 왔던 입주기업에 대한 지원활동도 새로운 연구개발에 마케팅까지 가미된 현지식 개발, 마케팅으로의 전환을 진행중이다.
한국인들은 실리콘밸리에 입성한 70년대로 거슬러 가보면 어언 4반세기에 달하는 실리콘밸리 입성역사가 있지만 제대로 된 클럽하나 갖지 못해왔다. 이제 세계 IT의 중심지 실리콘밸리에서 결성된 한인IT네트워크가 무사히 결성돼 한돌(?)을 보낸 만큼 이 보배로운 KIN이란 아기가 한인들을 뭉치게 하고 실리콘밸리에서 빛을 발하도록 만드는 일만 남았다.
그동안 우리에게 실리콘밸리는 세계 IT벤처산업의 발상지자, 최고봉이어서 바라보기조차 눈부신 거룩한 곳이었다.
그러나 인도인, 중국인들이 ‘TIE’라는 그들 나름의 휴먼네트워크 조직을 통해 가능성을 보여준 데 자극받아 한인들도 가능성을 위해 일어서기 시작했다. 지난 79년 샌프란시스코의 한인상공회의소가 생긴 이래 22년만에 한인들이 다시 일어섰다.
‘미래를 설계하며 동참합시다(Building the future, Be part of It).”
지난 겨울 KIN회의의 주제인 이말은 재삼 새해 실리콘밸리 한인들의 화두가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세계 첨단산업의 심장 실리콘밸리에서 과거와 같이 한사람씩 뛰는 고독한 마라톤경주를 해서는 안된다. 현지 디자이너 벤처사업가 김영세 사장의 지적처럼 ‘혼계영에 참여한 선수들처럼’ 대응해야 한다. 현지 문화의 이해, 기술력, 마케팅 그리고 자본동원 등에서 능력있는 한인들이 힘을 합해 실리콘밸리에서 새로운 한인벤처신화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지난 48년 윌리엄 쇼클리와 그의 친구들이 게르마늄 대신 ‘실리콘’을 이용해 먼저 트랜지스터를 만들기를 고집했기에 명명됐다는 실리콘밸리. 이 밸리는 이제 더이상 실리콘밸리만이 아닌 휴먼네크워크 밸리이기도 하다.
이제 세계 IT산업의 심장에 우뚝 선 한인들이 그 어느 민족보다 질긴 휴먼네트워크 구성을 위해 ‘작지만 한국인에게는 위대한’ 첫걸음을 내디디기 시작했다.
<이재구기자 jk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