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실리콘밸리의 韓人들-좌담회

 세계경기 침체와 미국의 보복전쟁 등 여러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많은 국내 IT기업들은 실리콘밸리를 향한 꿈을 키워가고 있다. 경기회복에 대한 전망은 제각각이지만 대다수 IT기업들이 재도약의 칼날을 갈고 있는 상황이다. 전자신문은 2002년 희망의 새해를 맞이하며 세계 IT산업의 심장부 실리콘밸리에서 현지 한인 기업가들과 함께 ‘한국기업의 성공적인 실리콘밸리 진출방안’을 주제로 좌담회를 가졌다. 지난해 12월 12일 미국 캘리포니아 서니베일 i파크에서 가진 좌담회에는 텔레비디오 황규빈 회장, KIN 김우경 이사장, AIS 하명환 사장, 이노디자인 김영세 사장 등이 참석했다.

◆한국기업의 성공적인 실리콘밸리 진출방안

 

△일시: 2001년 12월 12일 오후 16:00

△장소: 미국 캘리포니아 서니베일 i파크 1층 킬리만자로 룸

△참석자 : 황규빈 텔레비디오 회장, 김우경 KIN이사장, 하명환 AIS 사장, 김영세 이노디자인 사장, 이재구 전자신문 차장(사회)

△사회=오늘 이 자리는 실리콘밸리에 이미 진출한 여러 기업인들을 모시고 ‘한국기업의 성공적인 실리콘밸리 진출방안’에 대한 의견을 듣고자 마련됐습니다. 세계 경기가 전반적으로 침체된 상황에서 여전히 실리콘밸리에 진입하려는 많은 한국기업이 있습니다. 이들에게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진출을 준비할 수 있는지, 또 경계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들어보고자 합니다.

 우선 최근 실리콘밸리의 IT기업 생태계 변화에 대해 한 말씀해 주시죠.

 △황규빈(텔레비디오 회장)=미국 경제는 지난 2000년 4월을 고비로 닷컴산업이 붕괴하면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9·11 월드트레이드센터 테러로 인해 항공산업이 마비되면서 연료, 관광, 숙박 등 연관산업에 파급효과를 미쳤습니다. 미국 전역의 콘퍼런스, 해외 출장이 크게 줄었고 예약이 넘치던 실리콘밸리 호텔의 공실률이 50%를 웃돌았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두달 이상 끌어오다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아직 전쟁 휴유증을 감당해야 할 시기입니다. 현재 미국 내에서는 경기회복 시기에 대한 논의가 분분합니다. MIT 경제학자는 3∼6년 후, 하버드대 교수는 2년 후, 업계에서는 내년 이후에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전망합니다.

 개인적으로는 2년 후 정도면 경제 상황이 닷컴붕괴 이전으로 돌아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올해부터 경제 사정이 조금씩 나아져 올해 말부터는 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제 낙관론은 하이테크가 살아있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이테크의 중심인 실리콘밸리에 불황이 모든 거품을 앗아갔지만 IT신화를 이끌어온 수많은 인력과 벤처캐피털리스트, 마케팅, 컨설팅, 벤처 로펌 등 이른바 ‘인프라스트럭처’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사회=휴먼네트워크가 최근 화두로 떠오르고 있고 실리콘밸리 한인사회에서도 현재 민간단체인 한인IT네트워크(KIN:Korean IT Network)를 중심으로 한인간 만남이 활발히 전개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민족 네트워크의 나아갈 방향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하명환(AIS 사장)=지난 6월 KIN이 생기고 나서 네트워크가 활발히 결성되고 있습니다. SKIT, KASE 등 1세나 1.5세들이 만든 기존 한인 단체들이 뜻을 모아 KIN을 만들었습니다. 기존 단체는 각각의 활동을 하고 KIN은 이를 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면서 자금이나 기타부문의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의 벤처들이 지난 4∼6년 사이에 1만개 이상 생긴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1만개나 되는 벤처 중 미국시장에 와서 성공할 수 있는 기업은 다섯손가락 안에 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기술벤처로 꼽힌 회사들도 미국에 와서 성공을 거둔 사례는 없습니다. 이들은 단지 살기 위한 방편으로 기술을 만들며, 국내에서만 최고이고 최초일 뿐 결국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간과하는 가장 중요한 성공전략은 마케팅입니다. 상품을 개발할 때 사전 리서치를 거치지 않고 무작정 시작합니다. 공급자 중심의 기업관행은 더이상 시대가 아닙니다. 이제는 수요자 중심의 개발을 해야 합니다. 수요자가 좋아할 만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몇년 동안에 걸친 충분한 사전 리서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는 기업이 적어도 2∼4년 앞을 내다보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대기업이 아닌 벤처로서는 자체 역량으로 감당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정부가 일일이 돈을 대주기란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휴먼 네트워크입니다. 상품판매를 하는 세일즈 채널, 벤처 캐피털, 로펌 등 각 요소를 연결해주는 게 KIN의 역할입니다.

 △사회=KIN이 결성된 이후 한인네트워크의 움직임이 빨라졌다고 하는데 한인사회 분위기가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떤 점을 들 수 있겠습니까.

 △황규빈=실리콘밸리 내 한국사람들의 조직으로는 22년의 역사를 가진 한미상공회의소가 있습니다. 이민 1세가 뜻을 모아 만든 상공회의소는 1세 이후 1.5세나 2세의 참여가 없어 발전을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참여기업수가 많아지고 분야가 다양해지면서 저마다 이해관계가 달라 상공인 모두를 포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국인 사업가가 드물었지만 지금은 10만명이 넘는 교포가 있고 예컨대 슈퍼마켓만해도 400개가 존재합니다. 세탁소, 식료품점에서부터 각각 업종끼리 자체 모임을 결성하기 시작하면서 상공회의소에 올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민 2세들이 자체적으로 모여 만든 KASE나 한인 IT벤처들이 만든 SKIT 등 한인 단체만도 10개가 넘습니다.

 그러던 중 KIN이 설립되면서 각 기관을 설득하는 작업을 거친 끝에 마침내 구심점을 찾았습니다.

 KIN은 실리콘밸리의 하이테크 네트워크입니다. 처음에는 하이테크 관련 기업을 중심으로 모여 시작하지만 향후에는 정보기술을 가지고 한민족이 휴먼네트워크를 형성하자는 게 설립 취지입니다. 하이테크 즉 IT는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수단이자 촉매제일 뿐 KIN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KIN은 IT기업만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업종과 세대를 망라해 한민족 전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입니다. KIN은 600만 해외동포와 4700만 한국동포 그리고 2200만 북한동포를 규합해 7500만 한민족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할 것입니다.

 △김영세(이노디자인 사장)=KIN은 기업인만의 모임이 아닙니다. 1.5세대, 2세대, 3세대 중 각 분야 전문가가 모였습니다. 미국사회에 파고들어 성공하려면 우리 1세대보다는 1.5세나 2세대들이 유리합니다. 많은 한국인 2세들이 유명한 대학에서 귀재로 자라나고 있고 이는 우리의 재산입니다.

 IT테크놀로지로 세계가 작아지면서 동서양 문화가 차츰 융합되고 있습니다. 명석한 두뇌에 동서양 문화를 모두 접한 한국인 2세들이 앞으로 미국내에서 크게 활약할 것입니다. KIN이 이들 교포를 서둘러 영입하면 장차 한국에 큰 효자노릇을 하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미국내에서 한국기업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서는 서울에서 인력을 도입하는 것뿐 아니라 이미 미국내에 있는 한인 2세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단 IT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한인 2세들이 갖고 있는 데이터를 모으면 지금보다 10배 이상의 네트워크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게 중국이나 인도가 가지고 있는 강점이기도 합니다.

 △하명환=한국기업의 맹점 중 하나는 사회의 인프라를 활용하는 수준이 매우 낮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프라는 더이상 고속도로나 통신망 같은 하드웨어적인 백본이 아니라 바로 휴먼 인프라를 의미합니다. 실리콘밸리가 발전한 이유는 기술과 이런 제반 인프라가 자율적으로 융합한 때문입니다.

 △김영세=이를 ‘휴먼프라(Human-Fra)’로 명명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휴먼인프라를 만들어야 성공합니다. 모든 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명환=2세와 1세간에는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습니다. 1.5세가 1세를 이해하고 2세를 끌어올 수 있는 교량 역할을 해주길 바랍니다. 결국 2세들이 물려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한국벤처들이 실리콘밸리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은데 가장 큰 문제점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황규빈=제 경험에 비춰봤을 때도 사업을 시작했을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문화차이였습니다. 특히 직원과의 문화차이가 커서 갈등을 많이 겪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온 지 36년이 된 지금까지도 미국문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한국기업이 미국에 와서 미국문화를 이해하고 사업철학을 세우려면 몇십년이 걸립니다. 문화차이를 극복하는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휴먼네트워크를 사전에 구축해 오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사회=20∼30년 전 이민와 신화같은 존재가 된 기업가나 변호사, 벤처캐피털리스트로 활동 중인 많은 한국인 그리고 i파크에 입주한 벤처와 같은 신생기업들까지 있지만 인도나 중국에 비해 그 활동이 미약합니다. 인도나 중국의 성공비결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우경(KIN 이사장)=실리콘밸리, 샌타클래라 카운티 등 이른바 베이 에어리어(Bay Area)에서 활동하는 아시아 기업들은 미국내 다른 어떤 지역보다 자유롭고 제약과 편견을 덜 받습니다. 미국 전체에서 아시아인은 3.6%를 차지하는 소수민족이지만 샌타클래라에서는 그 비중이 20%를 넘습니다. 때문에 이 지역 아시아인들은 다른 지역 아시아인에 비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승진의 한계’를 상당히 극복한 상황입니다.

 아시아인이 실리콘밸리에서 부상한 데에는 중국인의 활약이 상당히 큽니다. 실리콘밸리 인구 43만명 중 12만명이 중국인입니다. 이들은 20년 전에 이미 중국인들끼리 휴먼네트워크를 구성해 결속을 다져왔습니다. 중국기업들은 스스로 기업을 만들고 중국인들로부터 투자를 받아 성공을 했습니다. 지난 80년부터 2000년까지 20년간 창업한 1만2000개 회사 중 아시아인이 창업한 회사는 4000개이고 이중 절반인 2000개 회사가 중국 CEO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한국기업들도 미국 주류사회에 진입하기에 앞서 자체적인 휴먼네트워크를 구성해 투자 기회를 확대하고 성공가능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사회=전체적으로 요약하자면 실리콘밸리에 진출하는 한국기업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곳의 문화를 이해하고 같이 호흡할 수 있도록 휴먼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초기에 정착한 기업과 갓 진출한 기업간의 연계성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돼야 합니다. 그러나 민간기업인 이상으로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이 아쉬운 경우도 있을 텐데요.

 △황규빈=KIN에 정부가 자금을 지원해 주기로 결정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개별 기업에 정부가 직접 투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인프라스트럭처에 투자해 달라는 당부를 정부에 하고 싶습니다. 우선 한국내에서부터 인프라를 구축해야 합니다. 한국내에는 해외정보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한국내 벤처기업들은 기술적인 백그라운드만 가지고 시작합니다. 이는 결국 엔지니어를 위한 상품이지 소비자를 위한 상품이 아닙니다. 이들이 마케팅정보를 받아 시장에 맞는 정보를 제때 받으면 훨씬 성공할 확률이 높아질 것입니다. 전세계 영사관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안입니다. 각 나라에 진출해 있는 KOTRA에 예산을 지원, 마케팅전담 기구를 설립해야 합니다. 이 기구를 활용해 마케팅 정보를 충분히 수집, 한국에 제공하면 피부에 와닿는 정책이 될 것입니다.

 △하명환=한국기업들의 문제점은 이미 말씀하신 대로 나와있고 목적은 한국기업에서 개발 생산된 상품이 해외에 진출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한국기업들에 힘이 없기 때문에 행정적인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가 스스로를 하나의 기업으로 인식하고 해외 마케팅에 대한 인식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세일즈 외교를 말로만 외치지 말고 정부 스스로 배우고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사회=늦어도 2년후에 실리콘밸리와 세계 IT경기회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을 가정한다면 이제부터 한국기업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황규빈=한국 1만 벤처기업 중 1%만 성공해도 100개 회사입니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 MS, 시스코 같은 회사가 100개가 나온다면 한국은 강국이 될 것입니다. 한국 벤처기업은 2년동안 자체 마케팅 스터디나 문화를 배울 시간이 부족합니다. 아무쪼록 KIN 같은 한인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 서로 윈윈해야 할 것입니다.

<서니베일(미국)/정리=조윤아기자 forang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