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다>(6)이헌조 LG전자고문

 대담=양승욱 생활전자부 부장(swyang@etnews.co.kr)

 

 57년 락희화학(현 LG화학)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지난 95년 LG전자 회장까지 역임한 LG전자 이헌조 고문(70)은 대기업 재벌들이 경영권을 세습해오던 오너 중심 체제의 우리나라 기업 환경속에서 처음으로 전문경영인 시대의 지평을 연 인물이다. 특히 국내 전자산업의 효시인 금성사(현 LG전자)에 59년 판매과장으로 발령을 받고 국산 라디오 시장을 개척한 ‘영업사원 1호’로 불리면서 국내 전자산업의 역사에 첫발을 내디딘 산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자산업계 종사자들은 종종 국내 전자산업이 어려운 경영 상황에 봉착해있거나 탈출구를 찾지 못할 때 LG강남타워 37층에 있는 이 고문 집무실의 문을 두드린다. 그가 전자산업계의 ‘원로’여서 예우 차원에서 방문하는 것이 아니다. 40여년전 당시 국산 제품이 일제 라디오에 비해 값도 비싸고 디자인도 엉성해 그 누구 하나 관심을 두지 않았던 국내 가전산업의 수준을 수십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세계 최대의 가전생산국의 하나로 확고한 위치를 다지게 하는 데 기여한 그 노하우를 빌려보기 위함이다. IMF 이후 또다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발전방향에 대한 조언을 듣기 위해 이른 아침 ‘망팔(望八)’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2년 만에 다시 찾아뵙게 되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57년 락희화학공업에 처음 입사해 오로지 ‘LG 울타리’에서 45년간 조직생활을 해왔습니다. 이 때문인지 조직의 생활습관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이제 과거 몸에 밴 조직생활의 틀을 벗어나 본래의 생체리듬으로 회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비단 생활습성뿐만 아니라 사고방식도 될 수 있는 한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물을 눈이 아닌 가슴으로 보고 느끼려 합니다. 반대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물론 후배경영인에게 조언을 해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누가 늙은이 말을 경청할까’하는 생각이 들어 침묵하는 게 현명하다 싶습니다.

 ―지금까지 이 고문께서 45년간 쌓아온 경영노하우를 후배경영자들에게 전달하지 않는다면 결국 개인의 것으로 남게 되는 것 아닙니까. 전자산업계의 원로로서 경영노하우를 후배에게 전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치 않습니다. 그 경영노하우는 저에게 남아 있는 게 결코 아닙니다. 저와 45년간을 동고동락하며 일했던 후배 경영인 또는 직장동료가 나로 말미암아 어떤 좋은 영향을 받았고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다면 그것이 바로 경영노하우를 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현재의 문제는 젊은 후배 경영자가 오히려 더 잘 풀어나갈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과거 ‘선배가 이런 식으로 헤쳐나갔으니 후배들도 똑같이 따라하라’는 식의 조언은 간섭일 뿐더러 경제와 기업 환경이 바뀐 사실을 모르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선배는 후배 경영자들에게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해 7월 경영담론집을 출간하셨는데 정도경영을 강조하신 게 눈에 띕니다. 경영자에게 정도경영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제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래서 기본 소질이 장사꾼 체질이 아니예요. 주변동료들이 저를 장사 못하는 사람이라고 평가는 해도 거짓말하거나 엉뚱한 짓을 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비록 제가 장사 못하는 축에 속했지만 살아남은 이유는 정도경영을 해온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수년전 LG그룹에서 정도경영을 표방해 윤리규범을 제정하고 이에 따른 행동규범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사업을 하는 데 ‘정도가 어디 있느냐’ ‘어떻게 경쟁에서 이기느냐’고 다들 그랬습니다. 전 정도를 걷는 사람은 실패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시장에서 편법이 통할순 있어도 세계시장에서 정도로 가지 않고는 초일류기업으로 발전할 수가 없어요. 편법은 한계가 있죠. 특히 사회단체 등과 달리 기업은 생산적인 조직으로 경제에 활력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업이 정도를 가지 않으면 결국 부패해 국가 전망이 위태롭습니다. 지금도 정도경영에 대해 신념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최고경영자라면 정도를 가야만 궁극적으로 초일류기업이 된다는 신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과거 40여년 동안 국내 전자산업은 성장가도를 달려왔습니다. 전자산업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또 한 차례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죠.

 ▲제가 현업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지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디지털(논리)과 아날로그(감성) 등 대립관계인 두 요소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디지털분야는 엄청나게 발전해왔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아날로그부문은 상대적으로 취약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드웨어기술은 발전해왔지만 소프트웨어부문은 취약합니다. 이제는 우리나라 전자산업도 디지털기술을 이용해 감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의료나 교육 관련 제품을 개발, 상품화해야 할 것입니다. 또 발달된 통신망에 실어나를 수 있는 오락물이나 콘텐츠 등도 우리나라 전자산업을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핵심분야라고 생각합니다.

 ―IT산업의 위기가 벤처몰락에 따른 후유증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벤처산업의 육성은 바람직한 정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IMF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벤처열풍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의 의도는 좋았지만 이를 잘못 이용했다는 생각입니다. 벤처의 70% 이상은 전자관련 사업체입니다. 벤처산업 육성을 위해 전자산업의 인적기반이 무너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한 기술인력의 공백을 빨리 메워야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자업체들의 경쟁력은 21세기 새로운 IT산업 환경에 필요한 인력을 어떻게 양성·확보하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1세기에는 인간이 테크놀로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가전산업의 위상은 일본에 이어 ‘제2가전자왕국’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만 최근 중국이 무서운 속도로 따라오고 있습니다. 우리 전자산업계는 중국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대개 알게 모르게 우리나라는 기술력이나 경제생활수준이 높다보니 중국을 깔보는 경향이 다분히 있었습니다. 그런 중국이 최근 급추격해오니까 두려워하는 게 당연하죠. 그러나 저는 ‘중국을 깔보지도 말고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첫째는 중국문화와 사고방식을 깊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문화와 사고에 대해선 익숙하면서도 중국에 대해선 너무나 몰라요. 거기엔 해방 이후 불어닥친 서로 다른 이념체제로 문화교류의 단절도 있었고 역사적인 피해의식으로 중국의 문화와 사상을 의도적이든 아니든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젠 이를 배워야 합니다. 또 하나는 중국이 급속한 경제발전의 성과를 이룬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경제발전 모델을 세우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중국의 경제발전 모델은 민주주의를 토대로 한 우리의 경제모델과는 서로 다릅니다. 끝으로 중국을 폭격기에 비유하면 우리나라는 전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량 생산체제를 기반으로 한 분야에서 우리 경쟁력은 중국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속도를 필요로 한 분야에선 우리의 경쟁력이 앞서나갈 것입니다. 따라서 단순 제품이 아닌 라이프사이클이 짧으면서 첨단 기술과 공정을 요하는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고히 다지면 중국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과의 승부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핵심 키워드는 바로 속도입니다.

 ―전자산업 발전에 노력하고 있는 후배 경영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어떤 게 있으신지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한 가지만 얘기하죠. ‘리더십 상실의 시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최근 법원에서 기업 경영진에 경영판단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는 경영자의 리더십을 크게 위축시킬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투명경영을 촉진하거나 자율적인 경영을 촉구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그러나 경영판단은 과학적인 판단과는 분명 달라요. 기업을 어떻게 이끌어가겠다는 최고경영자의 의사표시가 경영판단인데 실패한 경영판단에 대해서까지 법적 책임을 묻는다면 누가 쉽게 중요한 순간에 과감하게 경영판단을 내리겠습니까. 저는 후배 경영자에게도 리더십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가지라고 적극 권유하고 싶습니다. 기업은 리더십 없이는 결코 살아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죠. 윤리성·규칙준수·합리적 사고 등 3가지 정도경영의 원칙에 근거한 리더십을 후배경영자들이 강력히 발휘해 주기를 당부드립니다.

 

 약력

 △32년생 △57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졸업 △57년 락희화학 입사 △65년 반도상사 상무 △67년 럭키 상무 △70년 금성전기 전무 △72년 럭키 전무 △74년 금성계전 부사장 △76년 국제증권 사장 △78년 럭키금성그룹 기획조정실 겸 희성산업 사장 △84년 럭키금성상사 사장 △89년 금성사 사장 △93년 금성사 대표이사 부사장 △95년 LG전자 대표이사 회장 겸 전자미디어CU장 △96년 LG인화원 회장 겸 제니스 이사회 회장 △98년∼현재 LG전자 고문 △현 한국미래학회 회장, 한일문화교류기금 이사, 민족문화추진회 이사 △수상경력 금탑산업훈장·동탑산업훈장 △저서 ‘일과말들의 화석(이헌조 경영담론집Ⅰ)’ ‘초가삼간을 태워서라도(이헌조 경영담론집Ⅱ)’ ‘붉은 신호면 선다(이헌조 경영담론집Ⅲ)’ ‘혁신의 동지들이여(이헌조 경영담론집Ⅳ)

 <정리=안수민기자 smah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