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윤모씨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첫째 아들의 공책을 볼 때면 문법과 맞춤법에 전혀 맞지 않는 표현들이 많아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 때가 많다고 한다.
아들이 온라인게임을 하면서 채팅을 하고 친구들과 e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익숙해진 표현들이 그대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윤모씨는 일상적인 학습을 하거나 일기를 쓰면서 표준어에 맞지 않는 ‘통신 언어’를 별다른 생각없이 사용하는 아들을 따끔하게 혼내야 할지 그냥 좀 두고 지켜봐야 할지 쉽사리 판단이 서지 않아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 확산으로 채팅과 e메일이 일상화되고 휴대 전화기로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언어파괴’ 현상이 심각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쌔임.. 00이예여...’ ‘기분 저으시라구여..’ ‘글구’ ‘그러케’ .
최근 한 여자 고등학교 1년생이 국어 선생님께 보낸 e메일 가운데서 몇개를 뽑은 것이다. ‘선생님 00이에요’ ‘기분 좋으시라구요’ ‘그리고’ ‘그렇게’라는 뜻이다.
요즘 청소년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친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이같은 유행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인터넷 및 e메일 등에 친숙하지 못한 사람은 물론 인터넷과 e메일을 자주 사용하는 기성 세대들에게도 상당히 낯설다.
전문가들은 컴퓨터와 인터넷이 일반화된 불과 2∼3년전부터 이같은 현상이 나타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도가 붙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언어파괴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이유는 사실 생각보다 단순하다. 쓰기 쉽고 편하고 경제적이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터넷과 e메일, 문자메시지 전송 등이 빠르고 쉽고 편리한 생활을 향유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란 점을 생각하면 채팅과 e메일, 문자메시지 전송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파괴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사용하는 ‘파괴된 언어’를 이용해 보면 타자 속도가 빨라질 뿐만 아니라 기존의 언어 체계를 사용할 때와는 색다른 느낌을 공유할 수 있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같은 반응은 한자문화권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자는 입력의 난점으로 인해 한동안 컴퓨터나 인터넷에는 부적합 언어로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음을 기본으로 알파벳을 입력하는 한자입력 방식이 보편화되면서 새로운 평가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전통적인 방식의 입력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변형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식의 공감대마저 형성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언어파괴가 서해를 넘어가면 또다른 신문화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의 인터넷 전문가들은 최근 중국 네티즌이 한자의 특성을 이용해 말을 짧게 줄이거나 변형시켜 채팅을 하면서 입력 속도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빨라지고 있다며 이는 한자가 인터넷에 가장 적합한 문자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결국 한자 문화권 네티즌이 향후 세계 인터넷 문화를 선도할 것이라고 자평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최근들어 언어파괴 현상이 단순한 유행의 차원을 넘어 정상적인 언어 생활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된다.
지난해 문화관광부가 발간한 ‘바람직한 통신언어 확립을 위한 기초연구’에 따르면 우선 청소년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통신을 통한 언어의 오용은 큰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외국 사람이 시골에 가서 표준어를 익히기 전에 사투리를 먼저 배우는 양상이다.
전문가들은 파괴된 언어의 사용 확산은 언어 사용자 특히 학생들에게 문법 의식의 약화 현상으로 이어지며 이로 인해 지적 혼돈과 수학 장애까지 야기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이버공간에서의 언어파괴는 단순히 사이버공간에만 머무르지 않고 일상적인 언어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언어파괴 현상이 오프라인으로도 점차 확산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문광부의 보고서는 언어파괴 현상을 막고 기존의 언어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법 교육을 강화하고 컴퓨터 교육의 시작 단계에서 바른 문장을 통한 자판 익히기를 지도해 규범에 맞는 언어를 통신 공간에서 사용하도록 교육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가정과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문화를 정착시킴으로써 무분별한 언어파괴를 자제하도록 유도하고 통신 언어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바른 언어 사용을 위한 시민 운동을 강화해야 한다는 대안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사이버 공간에서 점차 세력을 확산, 일상 생활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언어파괴가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생겨난 현상인 만큼 이를 하나의 문화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30대 초반으로 e메일과 문자메시지 전송을 심심치 않게 즐기는 전문직 종사자 K씨의 경우 언어란 것이 끊임없이 변화·발전하고 있으며 지금의 표준 문법체계가 불과 얼마전에는 표준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을 들어 최근의 언어파괴 현상도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일부에서는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언어파괴는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으로 인위적으로 거스르기 어려운 대세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보면 언어파괴 문제에 대해 단기간에 가치판단을 내리고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분명한 점은 하나 있다. 지금부터라도 언어파괴 현상에 대한 문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시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언어파괴 현상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노력이 선행됐을 때만이 엄연히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갈수록 세력을 확산하고 있는 언어파괴 현상을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파괴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이해가 있을 때만이 언어파괴로 인한 문제와 부작용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란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단순히 유행을 쫒아 파괴된 통신 언어를 탐닉하지 말고 옳고 그름을 살펴 사용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인터뷰-조정현 한성여고 국어교사
무분별한 통신 언어를 일상 생활에서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학생들을 보면 일면 이해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학생들의 올바른 언어 생활과 교육적인 문제를 생각하면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성여고에서 국어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조정현 선생은 최근 청소년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언어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새로운 것을 어느 세대보다 빨리 받아들이려는 특성을 갖고 있는 여고생들은 ‘국어’ 선생인 조 교사에게마저 e메일을 보내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낼 때 파괴 또는 해체 언어를 사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조 교사는 “처음에는 규범에 맞지 않는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 학생들의 메일이나 문자메세지를 받으면 당황했지만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다”며 “국어 과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긴 하지만 아이들을 이해하고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문화를 이해하고 일정 정도 받아들여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청소년들의 언어 파괴가 공적인 영역에서는 그리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지 않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기본적인 국어 교육의 토대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파괴된 언어를 일상생활에까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습관이 몸에 배면 형식과 격식을 갖춰 글을 쓰거나 문서를 작성해야 할 경우 상당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요즘 학생들은 시험지에도 사이버 공간에서 사용하는 파괴된 언어를 쓰는 사례가 적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이 시험을 보면서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답안지에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조 교사의 설명.
“언어파괴 현상이 문제로 불거진 것이 불과 얼마전이고 이에 대한 정확한 조사연구도 아직은 미흡한 실정입니다. 국가 교육 정책 측면에서 이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공감대와 대처 방안이 마련되고 있으나 이를 교육과정에 반영하는데 않은 애로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조 교사는 “엄연히 존재하며 나름대로 존재 가치가 있는 현상을 무시하면서 학생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올바른 문법 교육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며 “교육적인 측면과 학생들의 입장을 동시에 고려하는 자세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열린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최근 확산되는 언어파괴 현상도 꼼꼼히 살펴보면 나름대로 규칙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며 “이같은 현상을 조사 연구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 교사는 “언어파괴가 옳다 그르다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만큼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라도 언어파괴에 대한 논의를 공론화시켜 바람직한 대응방안을 모색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성욱기자 sw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