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전자상가는 한국 게임산업의 발원지다. 전자오락실용 아케이드 게임기의 경우 청계천 등지의 전자상가에서 시작됐지만 PC게임과 비디오 콘솔 게임은 용산상가에서 태동했다. 80년대 초 용산전자상가에서 8비트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 시장이 생겨났고 90년대 초 PC게임 시장이 꽃을 피운 곳도 용산이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용산에 근거를 둔 패키지 소프트웨어의 유통이 쇠락한데다가 PC방 열풍이 불면서 용산은 게임산업의 메카로서 옛날의 명성을 잃어 버렸다. 이 와중에 한때 게임시장을 좌지우지했던 대형 유통사들이 잇딴 부도로 퇴출됐고 용산의 게임 인맥도 뿔뿔이 흩어졌다.
지난 4일 세고엔터테인먼트가 코스닥을 통해 주식거래를 시작했을 때 게임업계는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용산에서 게임 도매상으로 시작한 세고가 코스닥 등록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거래 개시후 연속 4일 상한가 행진을 계속하자 용산의 게임 유통사들은 환호를 질렀다. 게임 시장의 메카로서 용산이 잃어 버렸던 과거의 영예를 되찾을 수 있다는 비전을 보았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이 세고가 보유하고 있는 기술력과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창업 이후 수년 동안 함께 고생한 직원들이 비전을 갖고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고조돼 좋습니다.”
세고를 용산 최초의 코스닥 등록 게임업체로 키워낸 최역 사장(42세)은 담담하게 소감을 밝혔지만 마음 속에는 지난 20여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난 89년께라고 생각합니다. 당시는 일본 업체들이 비디오 콘솔 게임기로 세계 시장을 장악해 나갈 때였습니다. 세가, 닌텐도 등의 8비트 게임기들이 국내에 밀려들어 왔고 저도 세가의 가정용 게임기를 들여와 판매했습니다.”
최 사장이 보따리 장사로 게임산업과 인연을 맺었다. 이어 하이콤과 같은 대형 게임 유통업체에 몸을 담았던 최 사장은 93년 세고의 전신인 월드베스트사를 현재 세고의 이호 회장과 공동 창업한다.
“게임산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할 것이고 용산시장이 그 중심에 서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이 기회를 잡으려면 게임을 비즈니스 차원에서 바라보고 전문성을 갖춘 게임 유통사업을 펼쳐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후 최 사장은 월드베스트의 부사장으로서 용산 최고의 게임 유통 업체를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판매채널의 다양화와 전국적인 네트워크 확보, 소매점 체인의 운영 등을 통해 나름대로의 입지를 확보한 97년 최 사장은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다.
“한해에도 수십종의 게임 타이틀을 유통하면서 국산 게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을 실감했습니다. 외산 타이틀의 유통을 통해 매출을 올리면서도 국산 게임의 뒷받침이 없으면 한국 게임산업은 발전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게임산업의 시작과 모태는 유통이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결론에 이른 최 사장은 97년 6월 세고엔터테인먼트로 사명을 바꾼다. 사업영역도 국산 타이틀 개발과 배급, 아케이드 게임, 게임 엔진 개발 등으로 다각화했다.
99년부터는 양질의 국산 게임을 개발하려면 무엇보다도 기술력이 담보돼야 한다는 최 사장의 소신에 따라 국내 게임 배급 업체로는 드물게 3D 게임 엔진 개발에 나섰다. 국내 게임 시장에서 지난해부터 3D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앞선 판단이었다.
“퀘이크 3나 언리얼에 뒤지지 않는 3D 게임 엔진을 개발하자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미국 실리콘그래픽사의 그래픽 처리 기술인 오픈 GL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호환성이 뛰어나 PC, 온라인, 가정용 콘솔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할 수 있으며 범용 엔진으로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컨셉트를 설정했습니다.” 호환성과 범용성을 갖추고 있는 3D 엔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더욱이 개발사도 아닌 배급사가 개발한다는데 많은 사람이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지난 2000년 10월 ‘랩톤 GL’이라는 이름으로 PC용 3D 범용 엔진을 상품화하는데 그는 성공한다.
“부설 연구소를 별도로 만들어 15명의 프로그래머를 두고 개발에 매달렸습니다. 개발인원 자체가 웬만한 개발사 전체 인력보다 많습니다. 2년여의 개발 기간 끝에 지난 2000년 10월 1.0 버전을 출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세고가 정말 만들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외국의 유명 게임 엔진으로 착각할 정도로 뛰어나다는 평가도 들었습니다.”
대학과 학원 등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수요층을 확대하는 전략이 주효했다.
범용 엔진 판매를 통한 매출이 지난 2000년에는 7억원에 불과했지만 2000년에는 14억원으로 2배 늘었다. 올해에는 최소한 18억원 이상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세고는 현재 렙톤 GL을 기반으로 범용 3D 온라인 게임 엔진, 비디오 콘솔용 게임 엔진, 아케이드용 게임 엔진 등을 개발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아케이드용 3D 보드까지 개발해 내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용산의 게임 유통사가 대기업도 쉽지 않은 범용 3D 게임 엔진을 자체 개발해 제공하는 기술 중심의 게임 업체로 대변신하겠다는 게 그의 또다른 생각이다.
사업다각화도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특히 지난 2000년 상반기부터 시작한 업소용 아케이드 게임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고 있다. 퍼즐 게임 ‘테트리스 파이터즈’, 메달 게임기 ‘즐거운 숫자놀이’, 메달 게임기 ‘해적선’, 핀볼 게임 ‘파라오포춘’ 등을 출시해 지난해 20억원을 벌어들였다. 올해에는 매분기 1종 이상의 제품을 선보여 최소 25억원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목표다.
코스닥 등록 원년인 올해 최 사장은 기업의 안정성과 이익률의 제고에 초점을 맞춰 회사를 경영할 생각이다. 용산 업체가 패키지 유통에만 치중하다 보니 매출액에 비해 순이익이 적다는 고정관념을 깨트리겠다는 계산이다.
“올해 매출은 120억원 정도로 지난해의 98억원에 비해 22% 정도 늘려 잡았습니다. 하지만 경상 이익은 40% 정도 많은 20억원, 순이익 역시 40% 이상 늘어난 14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수치는 금융감독위원회에 보고하기 위해 보수적으로 추산한 목표치이며 실제 내부적으로는 매출목표의 50% 정도는 초과달성할 수 있을 것이란 설명이다.
특히 최 사장은 올해 본격적으로 형성될 비디오 콘솔 시장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용산을 근거로 한 전국적인 도·소매 유통 채널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X박스, PS2, 게임 큐브 등 게임기는 물론 타이틀 유통에도 자신이 있다는 것. 이 분야에서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리면 매출목표의 100% 초과 달성도 가능하다는 최 사장은 용산에서 꿈을 일궈 이제는 사내의 애칭인 ‘키다리 아저씨’처럼 먼곳을 바라보는 CEO임에 분명하다.
약력
△1960년생 △88년 호남대 졸업 △90년 하이콤 입사 △93년 월드베스트 부사장 △97년∼현재 세고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사)한국게임제작협회 부회장
<이창희기자 changh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