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버틸 힘이 없어요. 지난주 미국 출장 내내 전직을 생각했습니다.”
“아까운 인재들이 대기업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돈 더주고 미래 보장한다는데 안갈 사람 있겠어요. 붙잡자니 돈없고 신규채용할 만한 인력은 없고 죽을 맛입니다.”
한국 IT산업의 질적도약에 혁혁한 공을 세운 벤처기업들에 인재유출 비상이 걸렸다. 전반적으로 IT기업들이 고급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으나 유독 벤처업계 인력난이 가중되고 있는 것이다.
벤처인력 한파는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구조조정까지 단행한 대다수 벤처들로 하여금 연구·개발 의지마저 꺾이게 하고 있다. 최근 경기침체에 따른 벤처기업 선호도 저하와 대기업의 유혹, 그리고 동업종간 스카우트에 따른 핵심인력 유출 등이 주요 원인이다.
최근 대기업의 인력채용 현황을 살펴보자.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최근들어 상시 채용제도를 도입하고 있는데 경력사원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최근 2∼3년 사이 급증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최근 3년간 채용현황을 집계한 결과, 경력사원 채용이 지난 99년 200명에서 지난해 500명, 올해는 700명으로 늘어났다.
SKC&C의 경우 99년 170명에서 지난해 310명으로 경력사원 선발을 크게 늘렸다. 신입사원 선발인원 194명에 비해 60% 이상 늘어난 수치다. 삼성코닝은 99년 신입 95%, 경력 5%를 각각 선발했지만 지난해는 80%, 20%로 좁혀졌다. 이 회사는 특히 신규사업 확대에 따라 핵심기술인력 확보에 주력하고 있으며 향후 벤처를 통한 우수인력 채용비율을 확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LG CNS는 인력채용에서 창의성·성장가능성·해당 분야 전문성 등 기존 벤처들의 채용방침을 도입, 대기업 채용문화의 벤처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이 회사는 기업 질적도약의 핵심은 사람이고 사람만이 경쟁력이란 논리에 따라 우수 벤처인력을 중시한다고 강조한다.
최근 디지털밸리와 온-I&C연구소가 조사한 ‘IT인력수요 및 IT인력 양성사업 환경조사’에 따르면 대기업은 주로 소프트웨어(SW) 개발·기획 분야에서 최소 3년 이상 실무경험이 있는 경력자를 원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시스템 프로그래머, 모바일 관련기술, 게임 프로그래머, 인터넷 방송 관련 기술자, 인터넷 관련 기획, 웹카피라이터, 전문 마케터 등의 전문 인력 수급도 시급하게 여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향후 이와 관련된 벤처 인력유출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대기업체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IT인력은 IT관련 경력자(71.3%)였으며 다음은 대졸 신규 IT인력(26.2%), 석사급 IT인력(22.9%), IT전환 교육과정 이수자(8.3%) 등인 것으로 조사돼 실무 경험을 갖춘 경력자를 선호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IT인력 만족도 조사에서도 대기업들은 경력직 사원에 대한 만족도가 73.5%로 가장 높았고 다음은 대졸 신규 인력(42.9%), 전문대졸 인력(32%) 순으로 조사됐다.
벤처인력의 대기업 선회 현상은 대기업의 이같은 태도 때문만은 아니다. 환경변화 및 현실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한다. 연구·개발을 내세웠던 벤처 초창기와 지금의 현실은 사뭇 다르다. 벤처들은 개발된 기술 및 시스템을 앞세워 수익을 내야 하는 시점에 와있다. 그러나 현실은 제아무리 기술력이 있어도 실제 시장에서의 주도권은 대기업이 쉽게 장악하고 이는 곧 사업계약시 대기업 수주로 이어지며 이는 유능한 벤처인의 좌절로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여기서 벤처인력들은 원래 품었던 꿈과 현실의 차이에서 많은 괴리감을 맛본다고 벤처 관계자들은 지적한다. 실제로 최초 프로젝트 기획부터 몇달에 걸쳐 자료를 제공하고 스펙결정을 주도하더라도 대기업이 주계약자가 되는 일이 허다하다. 대기업의 하청업체로 일부 사업에 대해서만 참여하는 현실적 애환이 대기업행을 결심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 하나의 요소는 자본이다. 연구·개발투자에서 벤처는 자유롭지 못하다. 벤처의 생명수인 자본유치에 한계가 있다. 최근과 같은 경기침체와 위기론이 공존하는 가운데 벤처에 선뜻 투자하려는 금융권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이에 벤처인력들은 동요되고 희망과 열정만으로 투신한 이 길이 험난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주식이 휴지가 되고 스톡옵션이 무거운 짐이 된 이들에게 연구·개발에서조차 자유스럽지 못한 현실은 견디기 힘든 고통인 것이다.
벤처 인력난의 심각성은 인력유출뿐 아니라 신규채용에서도 드러난다. 대부분의 신규채용은 인맥을 통한 충원이나 프로그래밍 스킬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선발된 신규채용자들은 프로그램 능력은 우수하더라도 업무경험 부족으로 변화하는 프로세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 개발과 관리방법도 미숙해 상품의 부가가치화에 실패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대기업에서 수행하는 프로젝트에 인력을 공급, 경험을 쌓도록 하는 방법이 흔히 구사된다. 그런데 이 경우 우수한 인력들이 해당 프로젝트가 종료된 후에 그 대기업으로 소속을 옮기는 경우가 발생하곤 한다.
이에 벤처업계는 자체 시스템 개발에 투입해 교육·훈련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방법이라고 지적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창업 멤버들이 개발 방법론과 업무 프로세스에 깊은 지식이 있어야 한다. 또 이들이 직접 시스템 분석과 설계를 하면서 일부 업무에 참여시키는 형태가 요구된다. 적지않은 투자가 뒤따라야 하는 이 작업을 감당할 여력이 지금 벤처에는 없다.
최근에는 신규인력 공급조차 부족한 상태다. 대기업들이 좋은 인력의 입도선매에 나서고 있는데다 젊은층의 인식도 안정적인 중견기업이나 대기업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동조해 창업열기 역시 크게 위축됐다. 중소기업청은 전체 벤처기업(1만287개) 가운데 17%를 차지하는 교수·연구원 벤처창업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이들이 지난해 창업한 벤처수는 118개로 2000년의 694개를 크게 밑돌았다. 벤처의 인력유출, 채용난이 창업기피로까지 번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박규헌 이네트 사장은 “벤처 인력난 해소를 위해서는 인력관리 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지역·업종별 벤처 공동 인력개발시스템, 공동 복지시스템 등이 검토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즈니스모델 만으로 우수인력을 문단속하고 새로 유치하는 시기는 지났다는 게 대다수 벤처사장들의 고민이다.
<명승욱기자 swmay@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