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진한 에로 장면을 보더라도 무덤덤해요.”
유료 영화채널인 HBO에 근무하는 사대진 대리(32)는 최근 유별난 직업병을 얻었다. 웬만한 강도의 야한 화면들은 그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것.
HBO에서 방영되는 심야 성인물 중에서 과도한 노출장면을 가려내는 것이 그의 일이다 보니 이런 희귀한 직업병에 걸릴만도 하다.
하루종일 ‘살색 화면’만 감상해야 하는 그에게 붙여진 직업명은 일명 ‘에로영화 전담맨’이다.
액션영화 전문채널인 ‘OCN액션’의 채두병씨(30)도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기는 마찬가지다.
“폭력장면이 빈번한 액션영화 심의에 몰두하다보면 가끔 나도 모르게 거친 언행이 튀어나오기도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별 희한한 직업이 다 있네”라는 생각을 했다면 아직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최근 케이블TV에는 이에 버금가는 튀는 신종 직업가들이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디오자키(VJ)나 쇼핑호스트가 케이블TV를 통해 이름이 알려진 ‘1세대 직업군’이라면 이제는 보다 세분화되고 특이한 직업들이 속속 눈에 띈다.
‘TAR, AJ, FJ’
암호명 같은 이 단어들은 일반인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하지만 모두 최근 등장한 케이블TV의 이색 직업들이다.
TAR는 ‘Talents & Artists Relations’의 약자로 음악채널에만 존재하는 전문 직업이다. TAR의 임무는 가수를 비롯한 각종 출연자를 섭외하고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
‘오토자키’의 줄임말인 AJ는 매일경제TV가 자동차 정보 전문 프로그램인 ‘MBN 정보특급 모터라이프’를 신설하면서 선보인 자동차 전문 진행자다.
국내 AJ 1호로 활약중인 박선영씨(25)는 단순히 자동차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자동차와 관련된 각종 방송 아이템까지 기획한다.
신형 차가 출시되면 한 번씩 꼭 타보고 성능을 비교하는 것은 기본이다.
패션자키를 의미하는 ‘FJ’ 역시 패션에 대해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패션 전문가다. 동아TV 나주영·조경아·김유리 FJ는 각종 패션 전문 프로그램에서 의상을 소개하는 MC인 동시에 스스로 최신 유행 트렌드를 창조해내는 패션모델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채널장르가 점점 세분화되면서 그야말로 케이블TV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극도로 전문화된 직업들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전사의상·레이싱복·무술의상 중 오늘은 어떤 복장을 택할까.’
게임채널에 근무하는 일명 ‘게임 코디’들은 각 게임의 캐릭터에 맞는 의상을 직접 제작, 관리하는 직업으로, 게임채널이 늘어나면서 인기 직종으로 급부상한 사례다.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중계할 때 게임맵 여기저기를 마우스로 찍어 보여주는 일만을 전담하는 ‘게임맨 옵서버’ 역시 게임채널이 탄생시킨 이색 직업이다.
요리채널의 ‘맛집평가 PD’나 바둑채널의 ‘복기맨’, 여행 레저TV의 ‘경마 실황 중계 해설위원’ 등도 채널의 전문성 덕분에 국내에서는 유일무이한 직업들로 정평이 나 있다.
이처럼 케이블채널의 신종 직업이 쏟아져나오면서 이들 업종에 관심을 보이는 지원자도 늘어나는 추세다. 영화·게임·음악 등을 막론하고 특정 장르에 대한 열정이 각별한 사람이라면 1년 365일 그 분야에 푹 빠져 지낼 수 있는 전문 직업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문 직업인 만큼 요구하는 조건도 까다롭다는 것이 이들 이색 직업인의 조언이다. 남이 하지 않는 일인 만큼 각고의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리빙TV의 경마 전문 해설위원인 홍성호씨(38)는 하루가 30시간이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매일 새벽 5시 서울 경마공원에 나가 경주마들을 관찰하고 지인을 만나 친분을 유지하는 것에서부터 그의 일과는 시작된다.
특히 경기 출마표가 나오는 목·금요일에는 예상지를 찍어내고 편집을 하다보면 새벽 1시를 훌쩍 넘기기가 일쑤다.
뮤직비디오를 주요 콘텐츠로 방영하는 각 음악채널에는 ‘뮤직비디오 심의담당’이 있다. 이 일은 말그대로 사전심의를 통해 뮤직비디오에 담긴 폭력·자살·선정적인 장면 등을 확인하고 제작사에 수정 및 자체 편집을 요구하는 역할이다.
m.net에서 이 일을 7년째 맡고 있는 성미영씨(28)는 “최근 줄거리가 있는 드라마 형식의 뮤직비디오가 각광받으면서 심의작업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면서 “이들 작품은 짧은 시간 내에 강한 효과를 전달하기 위해 자주 강도높은 장면을 사용하기 때문에 삭제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매우 민감한 문제”라고 털어놓는다.
고충이 큰 반면 보람도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종합 오락채널인 NTV에서 외국 시리즈물 수입업무를 담당하는 조성욱 PD(36)는 “외국 시리즈물은 가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한 번 수입하면 막중한 책임이 뒤따른다”면서도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으면 기쁨도 배가된다”고 말했다.
온미디어의 허병일 영화채널본부장은 “케이블TV 방송사가 많은 신생 직업을 탄생시킨 것은 고도의 전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앞으로도 보다 전문적이고 특색있는 직업이 많이 선보이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