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작업을 마치고 본작업에 들어가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3D 애니메이션 작업 중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던 부분이 바로 모션캡처였다. 사람의 동작을 데이터로 받아 재가공하는 작업이 나에겐 생경했지만 흥미 가득한 작업이었고 배우들과의 공동작업 역시 즐거웠다.
특히 큰 키에 긴머리, 그리고 턱수염까지 노랗게 물들인 남자 모션배우는 스태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검은 가죽재킷에 검은 선글래스를 끼고 있던 이 배우는 한마디로 온 몸으로 터프가이의 자태를 발산하고 있었다. 음…. 최민수잖아. 그런데 선글래스를 벗으니 완전 강원래였다.
최민수표 선글래스 뒤에 강원래의 순둥이 눈이 있을 줄이야. 웃는 모습도 강원래와 흡사했다. 춤솜씨 또한 기가 막혀서 강원래 이미테이션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고 연기도 곧잘 소화했다. 하지만 파트너였던 여자배우는 안타깝게도 팔자걸음을 걸었다. 팔자걸음은 데이터를 일일이 수정해야 하기 때문에 공력과 시간이 많이 든다. 액션에 들어가면 몇 발자국은 괜찮지만 이내 팔자걸음으로 돌아가곤 했다. 할 수 없이 걷는 뒷모습 전신 샷은 남자배우가 대신해야 했다. 여자역을 맡겼더니 살랑살랑 엉덩이를 좌우로 리드미컬하게 흔들며 걸어가던 모습이란…. 정말로 섹시했다.
애니메이션 팀에서는 런딤 TV판 비주얼의 수정작업에 들어갔다. 어둡고 그늘이 드리워진 표정은 밝게 하고 악역은 더욱 악하게 표현될 수 있도록 페이셜 수정작업을 거듭했다. 근데, 남자 악역 캐릭터의 얼굴빛이 진했다. 그가 입을 열면 어금니가 하얗게 빛나 보여 마치 드라큘라 같았다. 작가는 그 캐릭터를 볼 때마다 ‘쓰읍-’ 하며 피를 빨아먹는 흉내를 내곤 했다. 여자 캐릭터 중 하나는 가슴이 유난히 컸다. 정면에서 보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았는데, 우리는 그 캐릭터를 ‘실리콘’이라고 불렀다. 사람이라면 예쁘고 풍만한 가슴 선이 아름다워 보이지만 3D 캐릭터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실리콘을 좀 빼자고 얘기했지만, 캐릭터를 새로 만드는 일은 우리 스케줄에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호사였다. 그 캐릭터는 첨부터 끝까지 무거운 가슴을 단 채 뛰고 굴렀다.
드디어 캐릭터의 립싱크 작업을 위한 선 녹음에 들어갔다. 귀신 나오기로 유명한 강남의 모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녹음작업. ‘귀신 보면 대박이며 정전되면 쪽박은 면한다더라….’ 우리는 웃으며 ‘이 참에 귀신 한 번 만나보자, 내가 가서 두꺼비집 내리고 올까’ 등의 얘기를 했다. 하지만 일주일간 계속된 작업 중에 정전이 된 적도 없었으며 귀신은 더더군다나 볼 수 없었다. 다만, 우리를 포함한 녹음 스태프들이 귀신의 몰골이 되도록 일을 했을 뿐이다.
작업돼 나온 결과물들은 1차 가편집을 거쳐 내부시사를 할 계획이었다. 사내 지하에서 시작된 편집작업. 하루는 아침부터 역한 냄새가 진동을 하더니 머리가 띵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괴로웠다. 정화조 역류로 인한 냄새가 지하에 가득했던 것이다. 이 냄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에서 8층까지 오르락내리락 했으며 전사원은 구수한 듯 자극적인 냄새에 헐떡여야 했다. 그뿐인가, 지하 편집실에 오래 있다보니 햇볕을 보기가 매우 힘들었던 우리는 좀비라는 별명을 얻었고, 별명에 걸맞게 누렇게 뜨고 허옇게 바랜 얼굴로 멍하니 떠돌아 다녔다.
어느 덧 8월. 슈렉과 툼 레이더, 파이널 판타지가 포진한 여름 극장가는 우리들에게 발돋움할 수 없는 담장 높은 집 같았다. 대형 블록버스터들이 관객을 유혹하는 그 시점을 피하기 위해 개봉일자를 늦추었다. 사내시사 결과 지적된 몇가지 의견들을 반영한 수정작업에 들어갔고, 양수리 영화진흥공사 소재 애니메이션 지원센터에서 본편집 작업을 했다.
우리를 완벽한 좀비로 만들어준 양수리 편집 합숙. 밤샘 작업하고 아침 먹고 들어가 눈 붙이고 다시 모이는 스케줄에 따라 일했다. 주위에서는 양수리 맑은 공기 마시며 일하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한 번 너희도 해 봐라’ 그러고 싶었다. 밖에 나가 공기 마실 시간 있는지. 결국은 밥도 시켜다 먹고, 컵라면도 사다 주는 것 먹고. 우린 집에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밤샘을 거듭했다.
<디지털드림스튜디오 한옥례 감독 cartoony@dds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