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제조전문서비스(EMS)의 초기 역사는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실리콘밸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각종 첨단전자업체가 태동하면서 생산을 위한 시설, 인력, 기타 투자 부담을 대신하는 단순 하청업체가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이다.
이들 생산하청업체는 소량·다품종의 유연한 생산성과 신속한 납기 등을 기반으로 조금씩 입지를 넓혔는데, 특히 IBM이 아웃소싱한 컴퓨터·PC 등의 제조물량을 수주하면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미국계 EMS업체 솔렉트론은 1977년 태양전지 제조업체로 출발해 한때 몰락 위기에 직면했으나, 1988년 IBM 출신의 생산전문가 니시무라를 CEO로 영입한 뒤 IBM 특수를 누리며 세계 최대의 EMS기업으로 승승장구했다.
미국의 4위 EMS업체 SCI 역시 IBM의 PC용 기판 생산을 통해 성장의 발판을 다졌고 3위인 셀레스티카도 IBM의 컴퓨터 공장이 분사(스핀오프)해 EMS 기업 변신에 성공한 사례다.
현재 미국에는 세계 10대 EMS 기업 중 7개 기업의 본사가 있다. 이들 미국계 대형 EMS업체의 매출은 나머지 3000개에 달하는 전세계 EMS 전문기업의 매출량을 모두 합친 것과 비슷한 규모다. 가히 EMS 종주국이라 할 만하다.
미국계 EMS업체의 특징은 어떤 제조업체와도 연계성을 띠지 않고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대상으로 생산을 수주하는 독립형 EMS이며 다른 업종에서 전자제품 생산으로 전환한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미국 EMS산업을 유지하는 힘의 원천은 ‘규모의 경제’다.
아무리 최첨단 제조설비를 대량으로 갖춰 생산성을 높여도 외국 전자제조업체들에 비해 압도적인 가격우위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플렉트로닉스 같은 대형 EMS업체들은 세계 각지의 생산공장에서 소요되는 엄청난 부품물량(buying power)을 무기로 공급사슬(서플라이체인)에 가혹한 가격협상을 요구하며 전세계 전자부품시장을 주물럭거리고 있다.
덩치는 곧 힘이라는 등식이 미국 EMS업계에서는 진리로 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판단에 따라 미국 EMS업체들은 경쟁력이 떨어지는 자국내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업체들을 게걸스럽게 인수합병하는 한편, 해외 유명기업의 굵직한 제조부문도 거침없이 사들이며 덩치를 불리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연간 20∼30%씩 성장하는 미국의 EMS산업이 가격·생산기술 면에서 여타 국가의 제조업 경쟁력이 범접하지 못할 단계로 올라설 것이다.
미국 EMS업체는 그동안 컴퓨터·이동전화 등 첨단정보통신기기가 주력이었기 때문에 한국 전자업계와 충돌 가능성이 작았다. 그러나 지난해 이후 솔렉트론이 소니·마쓰시타의 가전 생산물량을 인수하는 등 국내 주요 전자산업인 가전분야로 영역을 확대할 조짐이 나타나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산자부의 한 관계자는 지난 90년대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일본을 다시 추월하는 데 EMS가 성공적인 역할을 수행했지만 산업구조가 틀린 한국경제가 그대로 본받기에는 무리가 있다면서 미국 EMS 모델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