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 협상 이것만은 놓치지 말자>(2)비전부터 세워라

 하이닉스반도체의 매각협상을 지켜보는 반도체산업계는 “뭐라 딱히 표현할 수 없으나 정말 안타깝고 착잡하다”고 입을 모은다. 30여년간 반도체산업을 일궈오며 느낀 기쁨과 슬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가기 때문이다.

 1967년 세계 첨단 전자통신기업인 모토로라의 반도체공장(현 ASE코리아)을 한국에 유치해 온나라가 자부심으로 들떴다. 산학연과 정부가 똘똘 뭉쳐 64kD램 개발에 성공, 반도체대국이 되겠다는 야심을 가졌고 마침내 삼성전자가 세계 1위의 D램업체로 부상하는 짜릿한 경험도 했다.

 하지만 IMF 이후 삼성전자는 전력용반도체사업부(부천공장)를 페어차일드에 매각했고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합병됐다. 삼성전자는 비메모리분야의 알짜사업을 넘긴 데 대한 후유증을 겪었으며 현대와 LG의 합병사는 이제 목숨을 마이크론에 맡겨 놓는 지경이 됐다.

 매일같이 하이닉스의 매각소식을 접하는 반도체산업계는 ‘구조조정의 단추가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게 아닌가’하는 우려를 감추지 못한다.

 반도체학계의 한 원로교수는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소신도 없이 너무 급하게 자본의 논리로만 진행돼 구조조정이 실패했다”면서 “일단 팔고 보자는 식의 매각은 값을 높이 쳐 받더라도 결국 판 사업이나 남아 있는 사업 모두 부실로 연결되기 쉽다”고 지적했다.

 ASE코리아의 한 관계자는 “떠밀려 매각당하는 입장에서 협상의 주도권을 잡기는 정말 어렵지만 그래도 향후 독자 생존이 가능한 비전을 확실히 확보하지 않으면 매각 후가 더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이 진행중인 협상의 키가 단지 매각대금이나 부채탕감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지적이다.

 하이닉스가 당초 계획대로 메모리사업을 매각하고 비메모리 전문업체로 홀로서기 위해선 핵심 기술이나 투자, 인력을 어떻게 확보할지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마이크론에 넘어갈 메모리사업도 마찬가지다. 설비와 기술에 대한 투자가 지속적으로 이뤄져 국내 산업에 계속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협상도 이러한 비전을 갖고 진행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는 현 매각협상에선 뒷전에 밀려나 있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매각당시의 현안에만 매달려 미래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하면 단물이 빠진 후 ‘팽’당할 것일라고 지적했다. 마이크론보다는 하이닉스와 국내 반도체산업이 잃을 게 더욱 많다.

 이 대목에서 90년대 중반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의 구조조정 과정을 전하는 손영석 TI코리아 사장의 말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D램뿐만 아니라 당시 알짜사업이었던 방산사업까지 정리하면서 70년 TI의 역사가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많았지만 DSP와 아날로그 제품군으로 선택과 집중을 했기에 지금의 TI가 있다”고 설명하는 손 사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빨리 미래의 비전을 갖고 구조조정에 나섰더라면 반도체시장의 1위 자리를 인텔에 내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정부당국은 이번 협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진념 부총리는 “정부는 응원만 열심히 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반도체산업계는 우리 정부가 과연 누구를 응원하는지 헷갈려하고 있다.

 “정부가 협상에 간섭하라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마이크론에 넘어갈 하이닉스 생산라인을 국내 산업과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지, 하이닉스 비메모리사업을 어떻게 정상궤도에 진입시켜 국내 비메모리산업의 지렛대로 삼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도체업계의 한 관계자는 하이닉스 매각협상의 아쉬움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제값을 받는 것도 중요하나 매각 이후 하이닉스와 국내 반도체산업의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위한 시나리오를 마련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