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잘나간다던 벤처기업에 근무하는 프로그래머인 A씨는 얼마 전 캐나다의 IBM 지사로 자리를 옮겼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돈도 벌 수 있을 것 같았던 직장이었지만 벤처거품이 빠지면서 보너스는커녕 매월 봉급조차 제때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A씨는 이직을 했다기보다는 아예 이민을 떠난 것이었다.
국산 주전산기를 개발해온 유력업체의 B씨도 기업구조정이 시작되면서 회사가 주전산기사업을 포기하자 지난해 미국 에이직(ASIC) 전문업체인 에이직얼라이언스로 이직했다. B씨는 미국이 핵심기술 인력에게 제공하는 취업비자인 H-1B 비자를 발급받아 일하고 있으나 영주권을 얻는 대로 주저앉을 생각이다.
국내 유수의 반도체 회사에 지난해 3월까지 근무하던 C씨는 회사가 어려움에 빠지면서 미국 반도체 업체인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로 이직했다. 이유는 물론 회사가 부채와 반도체 경기의 후퇴로 말미암아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이직이란 것을 상상조차 못했던 C씨는 결국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는 꼬리표를 앞세워 이국행을 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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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통신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린 사건이 일어나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또 국내 한 반도체 업체에 근무해온 A팀은 아예 반도체 핵심기술을 경쟁국인 대만에 팔아넘겨 온 나라가 시끄러운 적도 있었다.
핵심기술은 기업의 핵심자산이라는 점에서 기업으로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 만큼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핵심기술 인력의 유출은 그다지 크게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기업의 수익과 직결되지 않을 뿐더러 기업측에서도 직원들의 사기를 고려해 쉬쉬하고 덮어두기 일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핵심기술 인력의 유출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요소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당장은 핵심기술의 설계도를 빼내는 것과 같은 타격은 없겠지만 결국은 설계도 이상의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기술에 대한 노하우와 가능성을 감안하면 설계도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핵심기술 인력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대체인력을 채용하는데 드는 비용만도 기존 비용의 2∼3배에 이를 뿐더러 기술력 약화나 사업추진 차질, 고객 이탈 등의 치명적인 손실은 이론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국가경쟁력 약화로 초래할 국부의 손실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심기술 인력의 엑소더스는 계속되고 있다. 경기과열과 벤처붐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던 1∼2년 전에 비해 일반 이민자나 이직자수는 전체적으로 줄어들고 있으나 핵심기술 인력의 해외 이직행렬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형이다. 경기부진으로 인해 실리콘밸리에 실업자가 넘쳐난다고는 하지만 핵심기술 인력의 경우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경기가 급속히 악화된 지난해 고국을 등진 핵심인력은 줄잡아 8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반 이민자나 취업자는 줄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더 안정적이고 교육여건이 나은 직장을 찾아 해외로 떠나는 하이테크 인력의 봇짐행렬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경기부진의 직격탄을 맞아 실업자가 양산되고 있는 미국은 반대로 핵심 하이테크 인력의 유입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비자나우닷컴에 따르면 미국으로 유입된 하이테크 인력은 경기가 극도로 악화된 지난해 오히려 14.4% 가량 늘어났다. 물론 이같은 사실은 미국의 하이테크 인력에 대한 문호개방 정책에 기인한다.
실제로 이같은 문제로 인해 국내에서는 IMF 이후 기업간 빅딜이나 기업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핵심 인력들이 해외로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내 주전산기 인력의 유실은 대표적인 케이스. 삼성·현대·LG·대우 등 3개 그룹이 참여해 10여년 동안 추진해온 주전산기 개발사업이 중단되면서 개발을 담당해온 핵심인력 중 일부는 벤처창업에 나서기도 했지만 일부는 미국행을 선택했다. 현대와 LG간 반도체 빅딜과 현대(하이닉스)의 부진은 일부 반도체 핵심기술 인력의 이국행을 도왔다. 가전이나 통신·네트워크 부문의 일부 핵심기술 인력도 해외로 빠져나갔다.
이와 함께 출연연의 경우도 빼놓을 수 없는 케이스. 국내 대표적인 고급두뇌 집단으로 일컬어지는 출연연의 퇴직자 중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찾아 고국을 등졌다. 과학기술부에 따르면 출연연 퇴직자중 해외로 이주한 사람을 집계한 결과 138명이 이미 이국행을 결행했으며 집계되지 않은 일부 인력까지 포함하면 실제로는 더 많은 수가 떠났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벤처붐을 타고 코스닥에 등록된 벤처기업의 일부 핵심인력은 등록으로 인한 이익실현과 함께 해외로 이주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현재의 기업여력으로 보면 다가오는 치열한 경쟁환경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일찌감치 지금까지 쌓아온 노하우를 갖고 미국과 같은 선진국 기업에 취직해 노후를 보장받고 싶다는 바람이 작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지금은 기업의 살림형편이 좋지 않아 떠나는 사람이 다수를 차지고 있지만 산업인프라나 사회구조 등 보다 근본적인 여건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더 나은 교육·문화 여건을 찾아 떠나려는 핵심인력의 행렬은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승정기자 sjpar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