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정보기술(IT)업체들이 증시에서 무리하게 돈을 끌어다 쓰면서 최대주주의 지분율이 크게 희석되거나 투자펀드 등 금융관련 투자자들에게 경영권을 넘기는 등 사실상 주인없이 운영되고 있다. 또 지난해 상당수 IT업체들이 IT경기 침체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헐값’으로 무리하게 유상증자나 외자유치를 추진하면서 최대주주 지분율이 낮은 중소벤처기업들의 ‘소유권’ 향방이 불분명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코스닥등록 당시만 해도 멀쩡했던 IT업체들이 왜 이렇게 됐을까. 일부 IT업체들이 확고한 수익모델을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신규 사업진출 등 사업확장에 필요한 자금을 무리하게 끌어다 쓴 후유증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CEO 경영권 방어 심각=한글과컴퓨터가 지난 3분기에 제출한 사업보고서의 자본금 변동현황을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이 회사는 지난 96년 코스닥등록 이후 다섯번의 유상증자를 하고 아홉번의 전환사채(CB)를 발행한 결과 ‘국가를 대표하는’ 벤처기업에서 ‘임자없는’ 벤처기업으로 둔갑했다.
정우철 대우증권 연구원은 “메디슨 등 대주주의 지분매각과 사업자금 조달을 위한 증자가 이어지면서 한글과컴퓨터는 임자없는 기업으로 전락했다”며 “최대주주가 사실상 공석인데도 경영권을 확보하려는 법인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온라인주식랭킹서비스업체인 미디어에퀴터블이 코스닥등록 IT업체의 법인을 제외한 개인 최대주주 현황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개인 최대주주 지분율 10% 미만인 곳이 무려 63개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표참조
이는 상당수 IT 벤처기업이 CEO와 최대주주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성혁 미디어에퀴터블 사장은 “상당수 IT업체들이 증권시장에서 무리하게 자금을 끌어다 쓴 결과 경영권을 위협받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증시를 통한 자금조달이 이어질 경우 IT업체들이 경영권 방어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확고한 수익모델을 마련하지 못한 IT업체들은 더욱 이같은 압박에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수익모델을 갖추지 못한 일부 IT업체들이 지난해 IT 경기불황으로 악화된 실적을 만회하기 위해 무리한 자금조달을 통한 공격적인 경영에 나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최대주주 겸 최고경영자들이 이에 따른 지분율 하락으로 경영권 방어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금융관련 투자자도 일시적인 주인=금융 관련 투자자들이 일시적으로 경영권을 맡고 있는 IT업체도 사실상 ‘경영공백’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현재 코스닥시장에 등록된 IT업체 중 금융 관련 투자자가 최대주주로 있는 곳은 줄잡아 20여곳에 이른다. 일부 인수후개발(A&D)의 경우처럼 금융 투자자들이 IT업체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이를 이용해 머니게임을 벌일 경우 IT업계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코스닥시장을 중심으로 상당수 벤처기업들이 주식시장을 통한 지나친 자금조달로 대주주 지분이 크게 낮아짐에 따라 확고한 수익을 담보하지 않는 한 대주주가 ‘돈’과 ‘경영권’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M사, T사 등 몇몇 코스닥등록 IT 벤처기업의 최대주주가 사업에 어려움을 겪자 보유지분을 매각, 눈총을 받기도 했다. 이들의 주식매각은 해당기업의 향후 사업전망을 불투명하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엄준호 현대증권 연구원은 “CEO나 최대주주마저 떠나는 기업의 주식을 누가 사겠냐”고 말했다.
코스닥증권시장에 따르면 코스닥등록 IT업체들이 최근 2년 동안 증권시장에서 유상증자만으로 무려 1조원에 육박하는 돈을 조달했다. 사채발행까지 합하면 2조원을 훌쩍 넘어선다. 이는 IT업체의 최대주주 지분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난 2000년 최대주주 지분이 0∼20%인 코스닥등록업체가 30개 불과했지만 지난해는 이의 2배가 넘는 77개로 늘어났다. 윤권택 코스닥증권시장 공시서비스팀장은 “최대주주 지분율이 20% 미만인 업체에서 최대주주의 지분변동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책은 없는가=전문가들은 IT업체들이 안정적인 최대주주를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김동준 굿모닝증권 연구원은 “코스닥등록 이후 향후 3년간 최대주주의 지분변동을 고정시킨다면 책임경영을 하는 IT업체들이 더욱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최대주주의 지분율이 10% 이하로 내려간 기업들은 증권전산단말기를 통해 이를 표시함으로써 투자자들이 기업의 경영상태를 신속히 체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IT업체들이 인수합병(M&A) 등 지분교환을 통해 시너지효과를 높일 수 있는 방안도 강구돼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김익종기자 ij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