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겉보기 등급 높이기에서 벗어나야죠.”
네트워크 장비 전문벤처기업인 A사의 J사장은 최근 벤처게이트, 벤처제도 논란, 메디슨 부도 등 일련의 사태에 대해 오히려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렇게 얘기한다. 남의 일이라는 생각보다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 쉽게 빠지기 쉬운 유혹(?)이라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자신과 회사가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갈 뿐이라고 말한다.
최근 일부 벤처의 그릇된 경영행태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지만 기술개발과 모험정신, 투명경영이라는 ‘기본기’에 충실해온 소위 ‘알짜’기업들은 다가올 벤처신화의 2막에 대한 기대를 품고 내실 다지기에 분주하다. 그들이 1세대 벤처가 닦은 성과와 시행착오를 기반으로 어떤 한국형 벤처경영의 모델을 만들어야 할까.
◇정도(正道)경영=최근 부도처리된 메디슨은 불과 2∼3년 전만 해도 스타벤처로 부르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지난 97년 세계 최초로 3차원 초음파진단기를 개발, 그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한 때 2122억원의 매출액에 514억원의 당기순이익, 시가총액이 7500억여원에 달했다. 하지만 벤처연방제라는 이름 아래 타법인출자에 나서 계열 및 관계사를 늘려갔고 각종 금융기법을 통한 몸집 불리기에 나섰다는 의혹을 받으며 결국 유동성 위기를 낳았다. 이러한 방식은 정도와 방식에 차이가 있지만 새롬기술·한글과컴퓨터 등 상당수 1세대 벤처들이 행한 기업활동이었다. 결국 자금 투자 및 지원을 통한 관계사 만들기는 불확실성에 근거한 투자라는 업계 평가와 함께 모 회사의 기업가치 불안정, 자금압박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또 일부 기업들은 기술개발 및 설비투자보다는 빌딩 매입 등 사실상의 부동산 투자를 통해 혹시 있을 위험을 회피하려 하거나 허위 매출실적을 작성하는 등 기존 전통산업의 그릇된 행태를 흉내내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이 더 이상 이런 경영활동에 호응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따라서 차세대 벤처는 기술개발의 순환 사이클을 확보하고 동시에 재무·회계의 투명성을 구축해야만 시장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해야 시장의 신뢰를 담보로 할 수 있고 향후 급변하는 시장환경에도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수익경영=요즘 벤처들은 투자시장 동결 때문이기도 하지만 투자유치를 유보하고 제품·서비스 승부를 통한 영업수익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그럴싸한 사업계획서와 서류상 인적 네트워크로 고액의 투자유치에 성공한 뒤 소위 ‘뜬다’는 사업에 무분별하게 뛰어들었던 과거 벤처에 비해 달라진 모습이다.
지난 99년 무료 인터넷 서비스 ‘다이얼패드’로 급부상했던 새롬기술은 결국 온라인 광고에 의존한 수익체계의 한계와 뒤이은 유료화 서비스 및 신규사업 고전으로 최근까지도 영업구조 개선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벤처캐피털 관계자들은 “대규모 펀딩에 성공한 뒤 시장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스타벤처들이 경영위기에 몰리고 있다”며 “이제 벤처의 생명은 고액 펀딩과 자금운용에 의한 자본이득(캐피털 게인)이 아니라 기술경쟁력과 시장기획력이라는 기본명제가 더욱 확실해졌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글로벌 경영=그동안 벤처기업들은 대부분 국내시장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뒤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요즘 떠오르는 벤처들은 창업 초기부터 해외시장을 목표로 삼거나 아예 해외법인을 먼저 설립해 글로벌화의 가능성을 타진, 역으로 국내시장에 진입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해외에서 싹이 없다면 국내법인은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또 해외시장 진출시에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 등 종속적 위치에서 벗어나 점차 자체 또는 현지기업과 공동 브랜드를 내놓거나 기술수출로 로열티 수입을 거두기도 한다. ‘벤처=글로벌’의 도식이 성립되고 있다.
특히 정부와 벤처캐피털이 우수 벤처를 걸러내기 위해 기술력과 잠재적 시장지배력을 최우선으로 꼽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고 이 두 요소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결국 ‘글로벌 경쟁력’만이 대안이 될 전망이다.
<이정환기자 victo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