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끝에서 맞잡은 손.’
하이닉스반도체와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극적 합의를 이뤄낸 데는 인피니온의 등장으로 인한 양사 안팎의 협상 결렬 우려가 크게 작용한 것이라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합의 배경=‘마이크론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겠다’는 인피니온의 주장이 마이크론을 압박하고 있다는 현지 언론의 보도처럼 인피니온 쪽으로 기울던 하이닉스의 반응에 마이크론으로선 상당히 다급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마이크론 주주들 역시 협상의 장기화를 우려해 마이크론에 조기타결을 종용한 것으로 알려져 양사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한몫 했다는 평가다.
이 때문에 하이닉스와 채권단이 D램 가격 인상과 인피니온 카드를 내세워 40억달러대 이상의 금액을 요구했지만 마이크론은 협상을 더이상 끌면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선 것으로 보인다.
하이닉스 역시 고용 승계와 잔존 하이닉스에 대한 투자에 대한 우려를 마이크론이 어느정도 불식시켜 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 합의 쪽으로 가닥을 잡았음을 밝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매각금액에 대해 마이크론이 상당수 양보했기에 가능했으리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당초 30억달러대 초반으로 제시됐던 매각금액이 박 사장의 말대로 ‘채권단이 원하는 수준’인 40억달러대에 근접했음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다음주 중 양해각서(MOU)를 교환한다고 해도 최종 타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인피니온 카드가 못내 불안하고 조기 타결을 원하는 채권단의 입장이 양사의 합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차 협상에서 이연수 외환은행 부행장과 드레스트 부행장이 함께 마이크론 본사를 방문해 협상에 배석한 것도 채권단의 입장을 마이크론에 분명히 전한 것도 한 요인으로 예상된다. 우리 정부가 헐값매각을 안하겠다는 의지 천명도 마이크론으로서는 적정 수준에서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도출했다는 분석도 있다.
결국 D램시장 회복에 힘입은 하이닉스가 채권단·인피니온·정부 등 안팎으로 강공을 펼칠 것이 주효한 배경으로 풀이된다.
◇향후 과제=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이 다음주 양해각서(MOU)를 교환한다고해서 협상의 모든 절차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본계약 체결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MOU를 교환하고도 결렬되는 사례가 적지 않게 있었다는 점에서 앞으로 두 회사의 협상도 적잖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우선 그간 골칫거리로 대두됐던 주식기준 일자 산정과 주식 맞교환, 채무 변제 방법 마련 등 여러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다.
또 채권단과 주주들의 동의 절차도 거쳐야 한다. 유진공장 채무 변환을 비롯한 회계 및 법적 절차가 상당수 필요해 최종 매각까지는 적어도 3∼6개월이 더 소요될 전망이다. 국내에선 일부 소액 주주들이 주식매수청구권 등을 행사할 가능성도 있다.
또 생산라인 운용 방안과 D램 품목 재구성 그리고 차세대 기술개발 등에 양사가 어떤 묘수를 내놓을 지도 머리를 맞대야 한다. 300㎜ 투자중인 삼성전자를 기술력으로 이겨낼 방법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고용문제도 난제다. 이번에 마이크론과 하이닉스는 이 문제에 대해서 상당한 합의를 본 것으로 보이나 각론에 들어가면 풀어야 할 과제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다만 고용문제에 대해선 마이크론의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박종섭 사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릴 수 도 있다.
메모리를 매각한 하이닉스의 장래도 큰 문제다. 마이크론은 이번에 잔존 하이닉스에 대해 적극적인 투자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으나 당장은 메모리 분야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하이닉스와 채권단이 비메모리 분야에 남게 될 부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벌써부터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하이닉스와 마이크론, 아직도 가야할 길은 많이 남았다.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