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11일. 두 대의 비행기가 18분 간격으로 110층짜리 빌딩에 잇따라 충돌하는 믿지 못할 장면이 긴급뉴스를 통해 흘러나오는 순간. 생체인식업체의 K사장은 “테러라는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생체인식 기술이 주목을 받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떠오르더라”고 고백했다. ‘제 발등에 불을 끄고 아비 발등에 불을 끈다’는 속담을 굳이 불러오지 않아도 자신의 이익부터 가늠하는 것이 인간의 솔직한 심사. 그 중에서도 “얼굴인식이 제일 각광을 받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대목에서는 K사장의 순발력이 오히려 감탄스럽다.
생체인식 기술은 신체특징을 이용해 개인을 인증한다는 편리함과 보안성에도 불구하고 프라이버시 보호라는 병목(bottle neck)에 막혀있었다. 보안강화와 프라이버시 보호의 팽팽한 대립을 깨는 변수로 등장한 것이 9·11 테러. K사장의 생각대로 미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면에 보안강화 진영의 ‘프라이버시와의 전쟁’도 치열하게 전개됐다.
대형 항공기가 살상무기로 변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미국은 출입국과 항공기 탑승의 보안강화에 나섰다. 여권에 지문 등 디지털 생체정보를 담는 법안을 마련, 하원 의결까지 마쳤고 지난해 9월 이후에만도 댈러스, 팜비치 공항에 얼굴인식 시스템이 설치됐다. 테러의 표적이 됐던 펜타곤은 지문과 얼굴 정보가 저장된 스마트카드를 전 직원에 공급할 계획이고 웨스트버지니아주는 얼굴인식 기술을 적용한 운전면허증을 준비중이다.
생체인식 기술의 유럽대륙 진출도 이어졌다. 암스테르담의 시폴(Schiphol) 국제공항에 홍채인식 기술을 이용한 출입국 검사대가 마련됐다. 이밖에도 런던의 히스로(Heathrow) 공항,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홍채인식 시스템이 설치됐고 아이슬란드 공항은 얼굴인식 시스템을 선택했다. 장문인식은 벤구리온(BenGurion) 공항과 텔아비브 공항으로 진출했다. 국내에서도 생체인식 기술을 적용한 출입국 관리 시스템이 정부에 제안됐다.
봇물터지듯 밀어닥치는 생체인식의 득세속에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한 우려는 순식간에 무너진 쌍둥이 빌딩처럼 사라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얼굴, 지문, 홍채, 장문 하나만으로 수많은 개인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우려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개인정보가 국가적, 세계적으로 연계되고 출입국 관리와 수사기관과의 정보 공유가 강화되다 보면 그야말로 ‘벼룩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 되고 만다. 테러 위협이 생체인식 업체들에 준 것은 보안강화에 대한 공감일 뿐, 프라이버시 보호를 짓누를 완장은 아니다.
지난해 11월말부터 홍채인식 출입국 관리를 시작한 시폴 공항의 모습은 보안강화와 프라이버시 보호가 만든 어정쩡한 타협을 보여준다. 홍채정보 등록을 원치 않는 사람은 여권의 사진과 얼굴을 대조하고 이것저것 캐묻는 예전의 검사대를 이용한다. 검사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당분간은 긴 줄에 하염없이 늘어서서 90달러의 등록비와 홍채정보 등록을 기꺼이 허락한 사람들의 ‘무사통과’를 지켜보는 수난을 감수해야만 할 모양이다.
<김용석기자 ys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