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맹’과 ‘컴맹’은 21세기 정보시대에 접어들어 새로 등장한 신(新) 용어다. 야후!국어사전(http://kr.kordic.yahoo.com)에 따르면 넷맹은 ‘어떤 사람이 컴퓨터를 다룰 줄 몰라 컴퓨터 통신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거나 그러한 사람’을 지칭하며 컴맹은 ‘어떤 사람이 컴퓨터를 전혀 다루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거나 그러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문맹(文盲)이라는 말에 빗대어 만든 신조어’라고 설명돼 있다.
문자가 정보를 기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매체였던 시절, 이를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문맹이라고 했듯이 현대 사회에서 정보를 기록·저장·전달하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넷맹과 컴맹으로 부르는 것이다.
문맹과 넷맹·컴맹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가정에서 혹은 직장에서 가치있는 정보에 접근하기 힘들기 때문에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과거 글자를 읽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은 정보를 얻지 못하고 이것이 곧 경쟁에서 뒤처지는 결과를 가져왔듯이 최근에는 PC와 인터넷을 활용하지 못하면 이러한 난관에 빠지게 된다.
취업 희망자의 경우를 보더라도 일일이 신문의 채용공고를 뒤지는 것보다 인터넷을 검색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물론 즉석에서 지원서를 제출할 수 있다. 주부들도 예외는 아니다. 인터넷쇼핑몰을 통하면 재래시장에서 흥정하는 것보다 더 싼 값에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다.
넷맹·컴맹은 사회생활에서도 손해 보기 일쑤다. A은행의 기업 고객 영업을 담당하고 있는 최 차장은 몇년 전 고객을 만나 명함을 주고받다가 예상치 못한 경험을 했다. e메일 주소가 무엇이냐는 고객의 질문에 휴대폰 번호가 명함에 있으니 그리로 연락하면 된다는 대답을 했다가 시대에 뒤처진 사람 취급을 받은 것. 최 차장은 “그 당시 e메일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휴대폰이 있기 때문에 e메일 계정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었다”며 당시의 곤혹스러움을 털어놓았다.
이처럼 인터넷과 PC가 일반인의 생활과 문화의 보편적인 수단으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넷맹이나 컴맹은 새로운 형태의 장애다. 하지만 상당수의 컴맹과 넷맹은 자신이 ‘IT 장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오히려 이를 고집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문제다. 넷맹과 컴맹 중 상당수는 인터넷과 PC를 이용할 만한 여건을 갖췄음에도 담을 쌓고 살아가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지금까지 인터넷과 PC 없이 잘 살아왔는데 굳이 이를 어렵게 배울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다. 연락할 일이 있으면 e메일 대신 휴대폰을 이용하면 되고 정보를 얻으려면 인터넷 대신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찾아보는 게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
27년 경력의 베테랑 택시 운전사 강씨도 비슷한 유형의 사람이다. 강씨는 PC를 어떻게 켜는지도 모르지만 살아가는 데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고 있다. 서울 시내 지리는 그동안의 경험으로 손바닥 꿰뚫듯이 알고 있고 부품 교환 및 정비는 단골 정비소를 통해 해오고 있다. 따라서 강씨에게 위치측정시스템(GPS)이니 인터넷 정비사이트니 하는 것은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들리는 게 당연하다.
강씨는 “이제껏 잘 해왔는데 비싼 돈 들여 PC나 인터넷을 배워 뭣하겠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강씨가 GPS를 이용한다면 흐름이 원활한 도로를 안내받아 보다 빠르게 손님을 목적지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이고 인터넷 정비사이트를 통해 저렴한 가격에 체계적인 정비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강씨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넷맹·컴맹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기술(IT)의 필요성과 그로 인한 이점을 인식시키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정보문화센터가 PC 비보유 가구 중 향후 구입 의향이 없는 가구들을 대상으로 그 이유를 조사한 결과 71.2%가 ‘필요가 없어서’라고 대답한 반면 ‘필요하나 구입비가 비싸서’라고 응답한 가구는 9.4%에 불과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비접속 가구 중 향후 인터넷 설치 의향이 없는 가구의 64.5%가 ‘필요가 없어서’라고 대답했다. 표참조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단순히 기능을 습득하는 것보다는 PC를 이용해 어떠한 것을 할 수 있고 이를 실생활에 어떻게 응용할 수 있는지 알려고 노력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충고한다. 한양대 컴퓨터교육과의 안미리 교수는 “무슨 일이든 뚜렷한 목표가 있을 때 학습속도도 빠르다”며 “조그마한 일이라도 자신의 생활에 PC와 인터넷을 활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인터뷰: 사이버문화연구소 민경배 소장
“PC와 인터넷을 모른다는 이유로 무능력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무조건 ‘넷맹’, ‘컴맹’이라고 폄하할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정보화에 동참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이버문화연구소(http://www.cyberculture.re.kr)의 민경배 소장(36)은 PC와 인터넷을 강요하기보다는 정보기술(IT)의 이점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경제적 빈곤과 신체장애 때문에 PC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본인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넷맹·컴맹의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다.
민 소장은 “21세기 정보시대를 맞아 PC와 인터넷이 필수 사항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막연한 기피증에 걸려 있다”며 “자발적으로 IT를 찾아가도록 하는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 소장은 콘텐츠의 다양화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어렵게 PC와 인터넷 활용법을 습득했더라도 이를 통해 통해 즐길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것. 민 소장은 “예를 들어 노인들은 인터넷에 접속해도 딱히 즐길 만한 내용물이 없는 게 현실”이라며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광범위한 영역에 걸친 콘텐츠가 제공된다면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인터넷 세계에 뛰어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민 소장은 넷맹·컴맹을 기술 차원이 아닌 문화 차원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제 IT가 생활의 일부분이 된 만큼 단순히 기술 수준으로 넷맹·컴맹을 가늠해서는 안된다”며 “통신 에티켓을 지키고 불법 소프트웨어를 구매하지 않는 등 올바른 IT문화의식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도 넷맹·컴맹을 구분하는 기준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
◆컴맹·넷맹 탈출기
서울 신촌 근처의 한 돈가스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는 최진석씨(31·서울 용산구 원효로 jinandjoo@korea.com). 평소 PC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최씨는 지난해 큰 맘 먹고 PC를 구입했다. 직업상 PC를 사용할 일은 없지만 주위에서 ‘컴맹’이라고 놀려대는 소리가 듣기 싫어 ‘일’을 저질렀던 것. 최씨는 하루빨리 컴맹에서 벗어나기 위해 PC학습서도 구입했고 초고속인터넷서비스도 신청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한달여가 지난 후부터 최씨의 PC에는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PC나 인터넷으로 특별히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씨는 “가장 먼저 문서 작성법을 배웠지만 채팅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인터넷도 처음에는 재미있었지만 한 일주일 정도 하고 나니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비싼 돈 들여 PC를 구매한 것을 후회했고 매달 3만원 정도씩 꼬박꼬박 빠져 나가는 초고속 인터넷 이용료도 아까웠다”고 회고했다.
그후로 몇 달동안 컴맹아닌 컴맹으로 지내던 최씨는 얼마전부터 다시 PC와 인터넷에 흥미를 갖게 됐다. 다름아닌 사이버 트레이딩 때문. 친구의 권유로 주식투자를 시작하면서 보다 저렴한 수수료로 거래할 수 있는 사이버 트레이딩을 이용하게 됐다. 이후 최씨는 단순히 주식거래뿐 아니라 시장 정보를 얻기 위해 인터넷 뉴스 사이트도 수시로 검색하게 됐다. 뚜렷한 목적을 가지자 PC와 인터넷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겨졌다.
지난주 최씨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딸에게 줄 곰인형을 구입하기도 했다. 시중 백화점보다 싸게 샀음은 물론이다. 요줌 최씨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다. 내친김에 인터넷에 가족만의 사이버세상을 만들어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최씨는 “컴맹이나 넷맹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자극제는 생활의 필요”라며 “내가 무엇을 해야하겠다는 목적 의식을 갖고 컴퓨터와 인터넷에 달려 드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충고했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