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업체들이 숨돌릴 틈도 없이 옷을 바꿔입고 있다. 메모리업체들이 비메모리시장을 넘보고 있으며 비메모리업체들도 전통적인 ‘텃밭’이 사라지고 있다. 이같은 환경변화는 메모리와 비메모리가 결합된 신개념의 시스템온칩(SoC)이 하루가 다르게 속속 등장하는 데다 전통적인 반도체의 수요처가 PC에서 휴대기기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 반도체업체들은 시시각각 변해가는 기술과 시장흐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제 ‘네 땅 내 땅’ 가리지 않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돌입했다.
◇메모리와 비메모리 경계가 허물어진다=삼성전자는 최근 인텔이 독주하고 있는 코드저장(NOR)형 플래시메모리시장에 진출하기로 했다. 그동안 데이터저장(NAND)형 플래시메모리시장에 주력해왔던 삼성전자가 이동전화단말기 등 음성통신기반의 휴대기기가 확산되면서 관련시장의 진출을 서두르고 있는 것. 이를 통해 삼성전자는 PC기반의 D램시장에서 누렸던 영예를 3세대 단말기·PDA 등 차기 휴대기기시장에서도 이뤄보겠다는 의지다.
삼성전자는 또 비메모리로 대변되는 시스템LSI와 메모리가 결합된 SoC 개발을 위해 자체 연구소도 마련, 오는 2005년까지 비메모리시장의 10위안에 진입한다는 계획이다.
마이크론도 D램 일변도에서 벗어나 플래시메모리와 비메모리시장으로의 진출을 모색중이다.
이 회사 역시 삼성전자와 마찬가지로 노어형 플래시메모리 진출을 추진중이며 궁극적으로 SoC를 바탕으로 반도체산업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전략이다. 마이크론이 하이닉스 메모리사업 인수와 비메모리 제휴를 추진하는 것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언뜻보면 두 회사가 메모리사업을 확대 강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더욱 큰 그림이 숨겨져 있다. 플래시메모리의 경우 휴대형기기의 핵심 메모리 제품이다. 휴대기기의 소형화와 멀티화가 급진전할 경우 플래시메모리는 단순히 메모리 제품을 넘어서게 된다. 바로 CPU 등과 통합된 SoC로 바뀌게 된다.
노어형 플래시메모리의 경우 세계 1, 2위는 인텔과 AMD다. 둘 다 CPU업체다. 그렇지만 반도체 주력 수요처가 PC에서 PDA, 이동전화기 등으로 휴대기기로 바뀌고 있다.
휴대기기용 CPU시장에선 모토로라 등 다른 업체들이 강세다.
삼성과 마이크론의 플래시메모리 사업강화는 이러한 새로운 휴대기기용 CPU업체들과의 연대로 이어지며 기존의 PC용 CPU업체들과는 대립관계를 형성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기존 틀을 모두 뒤집겠다는 움직임이 서서히 그러나 점차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무한경쟁의 시대=반도체 영역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앞으로 시장경쟁 구도도 이전보다 크게 달라질 것으로 관측된다. 지금까지 시장경쟁은 D램과 CPU 등 특정 품목에서 2개 이상의 업체가 경쟁하는 구도였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SoC기술이 급진전하면서 이제는 통합칩에 대한 기술을 누가 더 많이 갖고 있느냐에 따라 시장판도가 달라지게 됐다. D램 업체냐 시스템칩 업체냐 구분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물론 초기에는 메모리업체와 비메모리업체간의 세력싸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디 출신인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어느 업체가 먼저 시장 표준을 장악하느냐는 게 중요할 뿐이다.
메모리업체들은 그동안 이같은 주도권 경쟁에서 배제됐다. 기존 비메모리업체의 기득권이 워낙 강하기도 했지만 20개에 육박할 정도 메모리업체가 많은 것도 한 요인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업계재편으로 삼성전자와 마이크론과 같은 상위 몇개사만 살아남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상위 메모리업체들은 강력해진 시장지배력을 바탕으로 시장 표준 경쟁에도 가세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들은 필요에 따라 전략적인 파트너를 선택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메모리에서 비메모리까지 품목별로 상위 2, 3위 안에 든 업체간의 전략적 제휴가 앞으로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상위 업체들이 최근 전문 반도체기술업체를 인수하거나 제휴를 강화하는 것도 향후 상위 업체간 제휴에서 힘을 행사하기 위한 ‘몸집 불리기’로 풀이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하위 업체들은 퇴출되거나 상위 업체에 흡수될 것으로 보인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가고 ‘골리앗’끼리 싸우는 무한경쟁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