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에 투자하는 기업문화
기업 비즈니스에서 계획을 잘 세우는 것은 첫단추를 제대로 끼는 것처럼 중요하다. 그러나 계획을 어떻게 하면 잘 세우는지, 계획을 세우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을 위한 방법론을 갖고 있는 기업은 드물다. IT리서치 기관인 KRG가 발행하는 웹리포트인 KIC 30호에는 ‘계획에 투자하는 기업문화’라는 칼럼이 실려 있다. 계획에 투자하면 사업의 승률이 달라진다는 이 글을 통해 우리회사 계획이 어떻게 마련되고 실행되는지 한번쯤 점검해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다.
우리 기업은 ‘계획’에 얼마나 투자를 하고 있나. 벤처 게이트가 연일 터지면서 모럴 해저드에 대한 비판이 많지만 단지 자금을 머니게임이나 로비 등 엉뚱한 곳에 쓰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심각성은 덜 할지 몰라도 치밀한 계획없이 신규 사업을 추진하거나 주먹구구식으로 비즈니스를 이끌어가는 관행이 어쩌면 국내 기업에 더 만연돼 있는 풍토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기업의 신규 사업 진출에는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천억원의 투자자금이 동원된다. 많은 경우 그 성패는 기업의 운명을 좌우하고 투자자 역시 그 결과에 따라 엄청난 투자 손실을 볼 수도, 막대한 투자 이익을 올릴 수도 있다.
물론 대개의 기업은 이런 작업을 할 때마다 기획실 인력을 풀 가동하고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계획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동안 되풀이 된 수많은 실패 사례를 보면 과연 그 같은 준비작업이 얼마나 현실적인 것이었는지, 또는 그토록 노력해서 얻은 소중한 정보와 분석결과가 정작 사업계획에 제대로 반영됐는지를 의심하게 된다. 오히려 기업이 신규 사업 투자를 결정하는 데는 △경영자 개인의 선호나 소위 ‘사업적 감각’ △외부 평판 △목표 달성을 의식한 지나친 외형 확장 등의 요소가 더 큰 영향을 미칠 때가 있다.
또 다른 예로 기업 정보시스템 도입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많게는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이 들어가는 정보시스템 투자에 대해 그 타당성과 최적의 도입전략을 도출하는 정보시스템계획(ISP) 예산은 쉽사리 간과된다. 여전히 ISP 예산은 본 사업 수주에 대한 대가로 헐값에, 심지어는 무료로 제공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결과 프로젝트 전체가 난항에 빠지고 애써 투자한 시스템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마저 발생하고 있다. 몇억원의 ISP 예산을 아끼려다 수십억원 투자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있겠는가.
계획을 잘 짜야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기업은 계획을 잘 짜는 데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선뜻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잘 아는 일’이라는 착각이 알게 모르게 경영자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잘 아는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계획 수립 작업은 이미 정해진 결과를 설명하고 해명하기 위한 보조 역할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물론 그럴 수 있고 그럴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시장 수요는 갈수록 세분화되고 상황 변화에 따라 급격한 변화를 보인다. 시티폰 서비스가 사업 초기 그토록 주목을 받다가 1년도 안 돼 사라진 것이 좋은 예다. 지난해 CRM 시장이 크게 확대될 것이라는 예측만 믿고 정확한 계획없이 CRM사업 진출을 서두른 기업 역시 고전하고 있다.
처음부터 실패할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없다. 계획을 엉성하게 짜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다만 기존 업무 관행과 의사결정 구조의 허점이 부실한 계획을 낳고 실패의 위험을 도사리게 만드는 것이다. 기업의 기획담당자라면 ‘노’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안다. 사장이 ‘예스’를 강요해서라기보다는 애써 마련한 계획안을 폐기할 경우 그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폐기된 기획안을 갖고 담당자의 능력과 가치를 평가하는 기업풍토는 아직 국내에서는 생소하다. 그러나 만약 100억원이 투자될 위험한 사업계획에 대해 ‘노’라고 말했다면 그 기획자는 그 만큼 회사의 리스크를 줄이는 중대한 공헌을 한 셈이 된다. ‘노’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기업이 져야 될 리스크는 그만큼 작아지는 것이다.
올해도 기업마다 연간 사업계획과 신규사업계획, 투자계획 등을 세워 추진중에 있을 것이다. 뭔가 새로 시작할 때마다 다음 같은 문구를 떠올려보라고 권하고 싶다.
“계획에 투자하십시오. 사업의 승률이 달라집니다.”
전원하 KRG 대표이사 whchun@krgwe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