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분할다중접속(CDMA)방식 이동통신 성공신화는 한국 정부(정보통신부)와 기업의 도전정신이 일궈낸 개가다.
90년대 초반부터 고개를 든 세계 아날로그 이동통신(AMPS)의 디지털 전환작업의 헤게모니가 유럽방식인 GSM(Global System for Mobile communication)으로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과감하게 모험(CDMA)을 선택했다. 그 결과, 무선통신기기 수출 100억달러 시대(2001년)가 도래했다.
◇CDMA의 싹=91년 8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미국 퀄컴과 협약을 체결하고 CDMA 기술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퀄컴은 종업원 수 5명의 벤처기업이었으나 CDMA의 무선 주파수 스펙트럼 효율성을 포착, 기술개발에 나섰다.
이듬해 12월 ETRI는 삼성전자·LG정보통신·현대전자산업·맥슨전자 등과 이동통신교환기·무선기지국장치·디지털이동전화단말기 공동개발을 시작함으로써 CDMA상용화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이같은 한국의 노력에 힘입어 퀄컴도 굴지의 정보기술(IT)기업으로 성장했다.
◇CDMA상용화=96년 1월, 한국이 세계 최초로 CDMA방식 디지털 이동전화서비스를 시작했다. 한국기업이 CDMA 디지털 이동전화단말기를 속속 선보이면서 모토로라·노키아 등이 주도했던 이동통신기기 시장에도 큰 변화가 일었다.
실제 한국산 이동전화단말기의 국내시장 점유율이 80%로 급상승했다. 또 음성통화 위주였던 이동통신 서비스, 장비산업도 디지털화에 힘입어 데이터 통신형으로 일신했다.
이동전화단말기 자급자족에 따라 고성능, 다기능 경쟁이 점화됐다. 이같은 경쟁체제는 국산 이동전화단말기 수출력 강화로 이어졌다.
◇CDMA대중화=97년은 CDMA 디지털 이동통신이 본격적인 성장기로 접어든 시점이다. 97년 2월 시티폰(CT-2)서비스를 개시한 데 이어 10월부터 1.8㎓대역 개인휴대통신(PCS)서비스를 상용화함으로써 이동통신 강성대국의 초석을 놓았다.
당시 셀룰러 사업자 2개(SK텔레콤·신세기통신), PCS사업자 3개(한국통신프리텔·한솔엠닷컴·LG텔레콤)로 총 5개 사업자가 치열한 가입자 유치경쟁을 시작한 데다 삼성전자·LG전자·현대전자산업 등이 단말기 내수시장에서 격돌함으로써 97년에만 650만여대의 단말기가 공급됐다.
이어 98년에는 국내 이동전화가입자 수가 1300만명을 돌파, 이동전화 대중화시대를 열었다.
◇이동전화단말기 업그레이드=98년 이후로 이동전화 가입자 수가 1000만명을
넘어서면서 보다 작고 가벼우며 똑똑한 단말기들이 시장에 쏟아졌다.
특히 전력소모량을 30% 이상 줄일 수 있는 모바일스테이션모뎀(MSM) 3000칩 시리즈가 등장하고 원 보드 설계기술이 등장해 60∼80g대 단말기가 등장, 소형 경량화 속도가 빨라졌다. 또한 말(言)을 인식하는 단말기, 통화품질최적화(EVRC)기능 단말기가 출시되는 한편 문자메시지 기능 사용이 붐을 이뤘다.
궁극적으로 이동전화단말기가 데이터용 통신기기로 면모를 일신했다고 볼 수 있다.
◇무선인터넷시대=2000년, 이동전화단말기가 무선인터넷기기로 거듭났다. 무선인터넷 브라우저가 이동전화단말기로 내장되면서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을 검색하고 e메일을 전송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특히 2000년 10월, 최대 데이터 전송속도 144Kbps를 구현하는 cdma2000 1x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무려 800만명에 달하는 무선인터넷족(사용자)이 등장했다.
이같은 변화에 따라 이동전화단말기도 무선인터넷에 적합하도록 넓은 창(LCD)을 장착한 폴더형이 정착됐다.
국내시장에서 첨단 기능으로 무장한 채 까다로운 소비자의 현장검증을 통과한 국산 이동전화단말기는 2000년 51억달러, 2001년 80억달러의 수출실적으로 연결돼 ‘이동통신 강성대국 백년대계의 초석’을 놓았다.
<이은용기자 ey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