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MA]CDMA역사의 산증인들

 ‘양승택·서정욱·박항구·김창곤·안병성.’

 우리는 이들을 ‘대한민국 CDMA 역사의 산 증인’으로 추대하자. 그리고 이들 다섯 명과 더불어 역사에 이름을 남긴 혹은 남기지 않고 기꺼이 역사를 만들어낸 연구소와 업계·학계의 수많은 기술인력을 기억하자.

 그들은 이동통신기술의 불모지인 한국에 CDMA라는 씨앗을 들여와 척박한 토양을 기꺼이 갈고 싹을 틔워냄으로써 오늘날 전세계 통신 역사에 ‘CDMA 코리아’의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다.

 당시 내로라하는 통신 선진국과 CDMA 원천기술의 발원지인 미국조차 상용화를 성공시키지 못하던 미지의 기술을 세계 최초로 도입해 우리 이름으로 당당히 상용서비스를 실시하는 쾌거를 이뤄낸 개척자들이다.

 만년 기술 속국으로 방황하던 우리나라에 정보기술(IT) 산업이란 새 이정표를 보여준 선각자들. 우리 기술로 한 분야를 개척하고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가능성을 처음 던져 준 사람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이 일약 CDMA 종주국으로 거듭나기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살펴본다.

 1.“기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 서정욱입니다.”

 지난 95년 6월 12일. 1대의 버스가 남산 기슭을 돌며 한강 이남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 버스는 코엑스에서 열리는 ‘95 정보통신 전시회’를 참관하러 가는 기자단을 태우고 가는 길이었다. 이날 시작하는 95 정보통신 전시회에서는 역사적인 CDMA 이동전화 시연회가 처음으로 실시될 예정이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으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아 세계 최초로 CDMA 상용서비스를 개시하기로 한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이 CDMA 시스템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래 국산 시스템으로는 처음으로 데모를 선보이는 날이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난데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기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 서정욱입니다.”

 CDMA 개발 진행 상황을 요약한 자료를 뒤적이며 무료하게 전시관 도착을 기다리던 기자들은 갑작스런 사건에 흥미를 보였다. 서정욱 당시 한국이동통신 사장은 버스 스피커에 연결한 CDMA 단말기로 기자 한 명 한 명을 일일이 부르며 안부를 나눴다.

 시연회에 앞서 달리는 차 안에서의 CDMA 깜짝쇼는 대성공이었다. 전시회에서는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과 실무국장을 측정 차량에 태우고 CDMA 현장시험이 이어졌다.

 이렇게 해서 미국 퀄컴과 공동기술연구로 시작해 5년 동안 국내 연구진과 통신장비업체·서비스사업자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개발에 매진한 끝에 탄생한 CDMA기술이 세상에 첫선을 보이게 됐다.

 2.CDMA, 한국을 만나다

 92년 7월 샌디에이고 퀄컴 본사 회의실.

 한국에서 온 양승택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과 안병성 단장이 제이콥스 사장을 비롯한 퀄컴 임원진과 마주앉았다.

 “퀄컴사와 전자통신연구소는 CDMA 공동개발을 위한 상호원칙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이로써 퀄컴은 한국에 CDMA 개발을 위한 기술을 제공할 것이며, 한국이 CDMA를 성공시킬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양승택 소장과 제이콥스 퀄컴 사장이 공동개발협약에 서명하고 뒤이어 CDMA 개발비 1000만달러의 차용증서가 퀄컴에 전달됐다. 한국과 퀄컴이 CDMA 대장정을 향해 본격적으로 출발하는 순간이었다.

 양승택 소장과 안병성 단장은 퀄컴의 CDMA 원천기술을 도입해 한국의 통신 환경에 맞는 디지털 이동통신기술로 탄생시킨 기술 엘리트 중 단연 주역이다.

 실무진을 끌고 샌디에이고와 대덕을 오가며 기술을 전수해온 안 단장이 분대장이라면 양 소장은 분대를 거느리고 진두지휘하는 중대장인 셈이다. 양 소장과 안 단장은 CDMA가 업체에 의해 상용화 단계에 이르기 직전까지 모든 기술 개발과정을 도맡아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CDMA의 산파격인 전자통신연구소는 바로 이 두 사람의 지휘 아래 낮과 밤을 모른 채 하나둘씩 결실을 이뤄냈다.

 93년 체신부는 CDMA 프로젝트를 더욱 가속화하기 위해 이를 총괄적으로 관리할 이동통신 기술개발사업관리단을 설치하고 당시 서정욱 KIST 원장에게 단장직을 맡겼다. 서정욱 단장은 80년대 국산 전전자교환기(TDX)사업을 성공시켜 통신 수출의 신화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서 단장은 사업관리단을 맡는 즉시 사업실태 파악과 사업방향 재정립에 들어갔다. 96년 상용서비스 개시라는 대국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구소와 참여업체들을 독려했다.

 서 단장은 LG정보통신·삼성전자·현대전자·맥슨전자 등 민간 업체가 연구소와 퀄컴으로부터 핵심기술을 이전받아 국산 CDMA 이동통신시스템과 단말기를 개발해내는 데 성공하게 함으로써 CDMA기술을 상품화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3.CDMA, 날아오르다

 CDMA 상용화 직전 양승택 전자통신연구소장은 당시 박항구 교환단장을 이동통신단장 직에 앉혔다. 박항구 단장의 소임은 완성단계에 있는 이동통신시스템 기술을 마무리하는 일.

 기지국·제어국과 각종 서브시스템을 전체 시스템으로 묶는 대작업을 차질없이 완수해내야 했다. 박 단장은 전자통신연구소가 독자적으로 개발해온 한국형 CDMA시스템(KCS)을 보완, 상용성을 높이는 작업에 들어갔다.

 박항구 단장은 그때부터 시간과의 피말리는 전쟁에 들어갔다. 96년으로 예정된 상용서비스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 전에는 민간업체에 기술이전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연구소에서 이동통신시스템을 완성하고 서정욱 단장의 관리단이 실시하는 상용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는 일정도 촉박했다.

 삼성전자·현대전자·LG정보통신 등 업계도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95년 1월 LG정보통신은 핵심 108개 항목에 걸친 이동통신시스템 상용시험을 통과했다. 삼성전자도 단말기와 시스템 기술을 모두 확보함으로써 전방위체제를 갖추게 됐다.

 이제 남은 것은 사업자가 상용서비스를 위한 채비를 하는 일. 그런데 여기서 뜻하지 않은 위기가 닥쳤다. CDMA사업자로 사업권을 허가받은 신세기통신이 아날로그시스템 도입을 주장하고 나선 것. 이는 신세기통신의 주주간 세력다툼과 외국인 주주를 등에 업은 해외 장비업체들의 이권개입으로 얽히면서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김창곤 당시 기술심의관 부이사관은 신세기통신의 11% 주식을 소유한 에어터치사 회장 일행이 두 번이나 방한해 CDMA 실패 가능성을 거론하며 아날로그시스템 도입을 주장할 때 CDMA서비스를 조건으로 신세기통신에 사업권을 허가한 정부 정책을 일관성있게 추진한 주인공이다.

 김창곤 부이사관은 에어터치사가 청와대와 한국 정계에 걸친 영향력을 이용해 CDMA를 포기하고 모토로라 제품을 도입하려고 하는 시도를 철저히 차단, 마침내 96년 4월 신세기통신이 CDMA 상용서비스를 실시하도록 함으로써 당초 방침을 관철시켰다.

 신세기통신이 CDMA 상용서비스를 시연한 두 달 뒤인 96년 6월 10일 정보통신부는 PCS 3개 사업자를 선정했다. 한국통신프리텔·한솔PCS·LG텔레콤 3사의 출현 이후 지난 2000년까지 대한민국 이동통신 시장은 5강 체제를 유지하며 이동전화 전성기를 꽃피웠다.

 이동통신 가입자의 기하급수적인 성장세에 힘입어 통신사업자와 국내 이동통신 단말기 및 시스템업체들은 양적인 성장을 누렸다. 이제는 그간 축적한 기술 노하우를 바탕으로 해외 시장에서 한국 CDMA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다.

<조윤아기자 forang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