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후리후리한 ‘해골인간’이 층계 꼭대기에 멈춰서는가 싶더니 겁도 없이 계단 아래로 몸을 던진다. 머리를 앞세운 채 층계 바닥에 내리꽂힌 해골인간은 충격을 견디지 못한 채 널브러진다.
UCLA의 과학자인 페트로스 패라우초스 박사는 랩톱 컴퓨터에 같은 장면을 반복해 띄우며 껄껄대고 웃었고, 해골인간은 그의 거듭되는 명령을 쫓아 죽어라 층계에서 뛰어내렸다.
패라우초스 박사가 보여준 애니메이션은 단순하지만 여기에 사용된 기술은 복잡하다. 뛰어내리라는 초기 명령을 제외하면 해골인간의 추락 동작은 각본에 의한 것이 전혀 아니다. 그의 몸 움직임을 통제하는 것은 만화작가의 마우스가 아니라 ‘물리학의 법칙’이다.
아직은 단순한 프로토타입에 불과하지만 그는 자신이 만든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이 대담한 죽음의 곡예를 펼치는 할리우드의 스턴트맨들을 대체하는 날이 올 것으로 확신한다.
그는 “인간 감독과 사이버 배우가 함께 영화를 만드는 날이 올지 모른다”며 “연기를 잘하는 사이버 배우들에게도 오스카상을 주어야 할 것”이라고 농담을 던졌다.
패라우초스 박사가 반복해서 보여준 짤막한 장면은 아직 생소한 분야인 ‘물리학 기반 애니메이션(physics-based animation)의 ‘맛보기’에 해당한다. 영화나 비디오게임 등에 사용되는 이 기법은 현실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물리학의 법칙을 가상세계로 고스란히 연장시킨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비디오게임 ‘NFL 피버 2002’의 제작에 관여한 다미엔 네프 인공지능 수석 개발자는 “너나없이 물리학에 기초한 애니메이션을 신주단지처럼 모시지만 이 같은 기술을 활용한 작품은 아직까지 별로 없다”고 밝혔다.
NFL 피버 2002 역시 물리학에 기초한 애니메이션 기술을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스턴트 연기자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에 영향을 줄 신기술이 무르익어 가는데 대해 실제 착잡한 반응을 보였다.
케이블방송 HBO의 ‘식스 피트 언더’ 시리즈에 출연하고 있는 할리우드의 스턴트맨 벤 스캇은 이에 대해 “긍정적인 면이 있는 반면 부정적인 면도 있다”고 꼽았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고난도 연기를 사이버 스턴트맨에게 맡겨 위험 부담을 줄일 수 있어 좋긴 하지만 위험 부담이 줄어들면 스턴트맨의 밥그릇 또한 작아진다는 게 문제다. 이제까지 애니메이션 등장인물의 몸동작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는 전적으로 작가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최근에는 실제 연기자의 신체 각 부위에 감지기를 달아 스턴트 연기시의 몸동작을 포착한 자료 사진들이 영화사와 게임 제작업체들 사이에서 쓰임새를 넓혀가고 있다. 순간 포착 동작을 사이버 인물에게 프로그램한 뒤 이를 영화나 게임에 감쪽같이 삽입하는 방식이다.
패라우초스 박사와 동료였던 미셀 반 데 페인, 데미트리 테르조포로스와 빅토르 응 소 힝이 공동으로 창조한 물리학 기반 애니메이션 기법은 이들보다 분명 한수위의 방식이다. 이 기술의 핵심은 수학 공식을 이용해 만화가가 원하는 등장인물의 기본적인 몸놀림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예컨대 작중인물에게 팔을 추켜들라고 명령할 경우 몸통과 머리가 팔동작에 따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계산해 낸다. 등장인물에게 주어지는 움직임의 폭과, 컴퓨터로 창조한 중력과 가상 환경에 대한 감수성의 정도에 따라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동작과 행동거지는 자연스럽거나 부자연스럽게 보이게 된다.
물론 상황이 다르면 당연히 몸동작도 달라져야 한다. 미끄러운 빙판에서 넘어지는 것과 계단에서 구르는 동작이 같을 수는 없다. 물리학 기반 애니메이션 기법은 영화 ‘더 퍼펙트 스톰’에서 파도의 움직임을, ‘몬스터 주식회사’에서는 제임스 P 설리번의 털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 쓰였다. 반면 비디오 게임에서는 자동차 경주나 비행 경주 시뮬레이션을 프로그램하는 데 이 기술이 동원됐다. 만화 영화 주인공들에게 사실성을 불어넣어 주기란 쉽지가 않다. 중력뿐 아니라 감정도 몸동작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의 특수효과 스튜디오 디지털 도메인사의 다렌 헨들러 기술국장은 “사람들의 걸음걸이만 보아도 상대가 화가 났는지, 여성적인 성격의 남성인지 따위를 금방 알 수 있으나 물리학에 기반한 시스템으로는 이를 표현할 도리가 없다”고 지적했다.
조만간 개봉될 영화 타임머신에서 디지털 도메인은 수천명의 ‘해골 인간’들이 재와 뼈로 해체되는 장면을 만들어 내기 위해 물리학 기반 애니메이션 기술을 구사했다.
그러나 만화가들은 물리학을 활용해 인간의 몸동작을 본뜨는 것을 가급적 피하려 든다. 사람들의 눈이 워낙 날카로워 조금이라도 이상한 동작이 나오면 당장 알아채기 때문이다.
패라우초스 박사는 영화 감독들이 사이버 배우들에게 연기 지시를 내리는 날이 꼭 올 것으로 확신한다. 연기 지시를 따를 수 있는 완벽한 사이버 인간을 만들어내는 게 그의 궁극적인 목표다.
<브라이언리기자 brianlee@ibiztod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