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여성 감독은 여전히 그 희귀성으로 주목받는다. 박남옥 감독 이래 최은희·홍은원 등 여성 선배 감독이 활동을 시작한 지 40여년이 지나고 임순례·변영주·이정향·정재은 등 동시대 감독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말이다. 꼽아 봐야 10여명에 불과한, 더구나 40여년의 시간 속에서 얻어진 숫자로는 ‘희귀하다’라는 표현이 틀리지 않지만 이 ‘희귀한’ 여성 감독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시선과 표현으로 기억에 남을 영화를 만들어냈다.
특히 ‘숨결’ ‘세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 ‘미술관옆 동물원’ ‘고양이를 부탁해’ 같은 작품은 여성(감독)의 섬세한 시선과 정서, 여성이 처한 현실에 대한 예리한 포착,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 등이 생생하게 실려 있어 주류인 남성 감독의 작품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그래서 ‘희귀한’ 영화의 맛을 보여준다. 여기에 ‘반칙왕’의 프로듀서인 이미연이 ‘버스, 정류장’이라는 영화의 감독으로 가세한다.
‘버스, 정류장’은 30대 남자와 여고생의 사랑이야기다.
남자(김태우)는 학원강사고, 여고생(김민정)은 남자가 있는 학원에 다니는 학생이다. 영화의 컨셉트 자체만 본다면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진부한 이야기로 들린다. 학원강사와 여고생의 러브스토리-학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선생과 수강생이라는 제약된 관계,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서로를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쯤으로.
그러나 이 영화는 나이 차를 넘어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고 서로에게 기대는 연인의 이야기로 흘러가면서 아픔과 소통에 대해 가닥을 잡기 시작한다. 남자는 이 세상의 변화에 뒤져 있다. 그는 ‘나이값을 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세속의 때를 적당히 묻히고, 적당히 타협하고, 그렇게 적응해가야 하는 삶의 방식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순수한 열정을 가진 이상주의자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면서 권태롭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며 살아간다. 이 남자의 상처를 알아보는 것은 여고생이다. 그녀 역시 산다는 것에 그다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친구의 자살, 임신 같은 극단적인 경험을 한 이 여고생이 바라보는 세상은 무의미하거나 빈 공간일 뿐이다. 같은 방식으로 또는 같은 방향에서 세상을 보는 두 사람이 교감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당연하다.
‘버스, 정류장’은 아마도 ‘8월의 크리스마스’ 이래 본격적으로 한국 멜로의 흐름을 형성하기 시작한 듯 보이는 ‘쿨한 멜로’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절제와 압축, 여운이 멜로 본연의 정서적 과잉의 드라마터지(dramaturgy)를 컨트롤하고 있는 것이다.
<조혜정 영화평론가, 수원대 교수 chohyej@hanmail.net>
<조인혜기자 ihch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