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통신 ‘바다사랑 동호회’의 회원 8명이 해변으로 여름여행을 떠난다.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한 사람이 기차에서 살해당한다. 별장에 도착하지만 하나 둘씩 죽음을 맞이한다. 범인은 이들과 같은 바다사랑 동아리의 회원. 더욱이 이 범인은 통신상에서 이른바 ‘왕따’를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잔인한 살인극을 벌여 충격을 준다.
지난해 개봉된 한국영화 ‘해변으로 가다’의 줄거리다. 컴퓨터 통신이란 가상공간에서의 소외감이 현실에서 살인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설정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개봉 당시 일부 비평가들은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로 치부했지만 지금 주변을 돌아보면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자살, 스와핑, 살인 등 사회적으로 금기시돼 온 주제에 대한 온라인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들 커뮤니티의 회원들은 가상공간을 통해 살인, 자살 등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는데 머물지 않고 현실 속에서 이를 감행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추세다. 인터넷이란 신IT기술이 사회 구성원간 암묵적으로 지켜오던 공동체의식을 갈기갈기 해체할 수 있음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IT기술의 발달로 ‘사이버 월드’라는 새로운 커뮤니티가 등장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출현에 따라 공동체의식도 변하고 있다. 사이버공간에서 나타나는 공동체형태만 해도 전자우편, 유즈넷, 게시판, 웹사이트, 대화방, 온라인 게임 길드 등을 통해 형성되는 이들 공동체에는 현실의 세상처럼 선과 악이 공존한다.
특히 일부 커뮤니티의 경우 오프라인 공동체를 강화하는 긍정적인 역할도 한다. 아이러브스쿨같은 동문회사이트가 이런 경우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시간적, 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나 온라인을 통해 자유롭게 만나고, 더 나아가 현실에서 직접 모임을 갖기도 한다.
사이버공동체가 커뮤니케이션의 회복 등과 같은 장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의 공동체 의식을 해체하고 개인주의, 소외현상 등과 같은 문제점을 확산하는 주역으로 여겨지는 것은 사이버 공동체에 만연한 상업주의가 근본적인 윈인이라는 지적이다.
사이버문화연구소 민경배 소장은 “인터넷의 확장이 상업화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이버공동체가 시민사회의 커뮤니티라기보다는 ‘상업 공동체’ ‘서비스 공동체’로 타락하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했다. 현재 인기를 끌고있는 ‘아바타’의 출현도 한 예가 될 수 있다. 아바타로 인해 온라인 공동체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고는 있지만 결국 아바타는 상품화의 결과물이란 지적이다.
민 소장은 IT문화가 수직적인 공동체 의식을 수평적으로 바뀌게 할 수 있는 동력을 갖고 있지만 현재의 상황은 오히려 수직성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점도 우려했다. 예를 들어 다음커뮤니케이션이나 프리챌 등 유명한 커뮤니티 사이트의 분류체계를 보면 가장 많은 커뮤니티를 생성해내는 분야가 중고교 대학 등 동문회 부문이다. 지역 혹은 연령의 카테고리가 그 다음이다. 그야말로 오프라인 상에서 벌어지는 학맥, 지연, 연령에 대한 집착이 그대로 온라인상에서 재현되는 경우다.
고품격 사이트도 이에 해당한다.명품만을 살 수 있는 특별계층만을 위한 사이트가 지나치게 활성화되면 계급적 위화감까지 조성해 공동체의식을 파괴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양대학교의 윤영민 사회정보학과 교수는 “과거 공동체 관념을 전제로 할 때 분명히 다른 유형의 공동체의식이 나타나고 있다”며 “자유롭고 평등한 성찰적 공동체의식을 갖기 위해 개별적인 노력이 절실한 때”라고 강조했다. 억압되고 폐쇄된 명목상의 공동체는 버티기 힘들고 개방적이고 자율스러운 공동체만이 살아남는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IT기술과 문화가 기존 오프라인의 공동체의식을 파괴하는 주범이라는 근시안적인 태도는 문제해결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신IT문화가 공동체의식을 고양할 수 있도록 하려면 새로운 추세인 공동체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되 독버섯만은 과감히 솎아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인터뷰>- 조동기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
“다방면에서 정보화로 인해 공동체 의식에 대한 개념이 시나브로 변하고 있으며 사이버 공동체 역시 제 역할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조동기 책임연구원은 “신IT문화로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의식의 양질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조 연구원은 최근 ‘사이버공간에서의 여론형성과 집합행동’이란 보고서를 내놓았다. 최근 1, 2년 사이에 사이버 공동체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는 것이 조 연구원의 생각이다. 불과 1, 2년 전만 해도 사이버 공동체의 공통적인 추세를 뽑아내기가 힘들 정도로 무질서했으나 이제는 분석이 가능할 정도로 정립돼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사이버 공동체는 자율적인 상호 커뮤니케이션 때문에 자생적으로 생겨 점진적으로 발전해왔습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인터넷 인프라의 급속한 확산과 닷컴 열풍의 결과로 사이버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그동안 개인들은 서버에 접속하는데 급급했고 사이버문화도 많이 왜곡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점차 높아져 새로운 사이버 공동체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2년 전만 해도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많아 사이버 커뮤니티가 새로운 공동체의식을 만들어내기는 힘들었지만 최근에는 주부층, 노인층 등의 인터넷 활용이 늘어나 양질전환이 가능해질 것으로 그는 전망했다.
“기존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IT문화는 공동체의식을 해체하려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처럼 새로운 공동체의식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조 연구원은 신IT문화가 공동체의식을 해체한다는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보다는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병희기자 shake@etnews.co.kr>
◆사이버공동체 성공 사례
건전한 공동체를 만드려는 시민운동의 활성화에 인터넷이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시민운동이 인터넷을 만나면서 신문·방송과 같은 매체의 한계에서 벗어나 좀더 강력한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된 것. 특히 대부분의 시민단체 회원들이 자신의 직업을 갖고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터넷과 사이버 커뮤니티는 시간과 장소의 제약에서 벗어난 적극적인 활동을 보장해주는 도구가 아닐 수 없다.
환경시민운동단체인 녹색연합(http://www.greenkorea.org)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 단체 사이트의 하루 접속 건수는 1000∼1500건에 달한다. 신규 가입자 중 절반 이상이 인터넷으로 가입할 정도다.
한상민 녹색연합 사이버팀장은 “90년들어 NGO가 전세계에 걸쳐 강력한 활동을 펼치 수 있는 것도 인터넷 덕분”이라며 “녹색연합 업무의 상당부분이 인터넷과 사이버 커뮤니티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시민운동단체인 경실련(http://www.ccej.or.kr)도 인터넷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이 단체는 처음에는 단순 홍보도구로 활용하려 했으나 이제는 인터넷을 이용한 활동계획을 수립할 정도로 중요한 부문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그동안 일부 언론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던 경실련의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전달함으로써 다양한 이슈를 사회 문제화하는데 적극 활용하고 있다.
위정희 사이버 NGO 담당자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정보를 전달할 수 있으며, 시민들의 반응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터넷 활용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며 “시민들의 참여와 관심이 날로 높아져 온라인 회원들만을 위한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구상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