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멀지않은 곳에 강화도가 있다. 섬이긴 하지만, 뭍과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높은 산과 넓은 들이 있어 섬 같지 않은 섬이다.
강화도에는 신비의 영산 마리산이 있고, 그 정상에 단군시대부터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참성단이 유명하다. 참성단은 전국체전에서 사용하는 성화를 채화하는 곳으로, 오랜 풍상에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리산에서 멀지않은 곳에 단군의 세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이 정족산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고, 삼랑성 안에는 고구려 때 건립된 사찰 전등사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훔쳐간 도서가 소장돼 있던 외규장각이 자리하고 있다.
강화도에는 선사시대의 유물도 많이 남아있다. 특히, 남한 최대 크기를 자랑하는 강화지석묘를 포함한 많은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어 단군시대의 전설이 전설이 아닌 사실일 수 있다는 개연성을 높여준다.
섬 전체가 역사 박물관인 강화도는 기구한 운명의 섬으로, 조선팔도 그 어느 곳보다도 많은 수난과 고통을 당했다. 물이 많고 들이 넓어 자급자족하는데 어려움이 없었기에 더 많은 시련을 당한 섬이다.
1232년 몽고군이 침입을 해오자 고려 고종(高宗)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강도라 칭하고 몽고에 대해 항전했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기까지 그 항전은 이어졌고, 그 기간동안 불심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불경 한자 한자를 나무에 새긴 팔만대장경도 강화도 선원사에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인조(仁祖)가 강화도로 피난을 했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과 봉림대군, 인평대군이 피난을 했다. 당시 인조는 폭설로 강화까지 오지 못하고 백관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싸우다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남한산성을 열고 오랑캐들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1866년에는 대원군이 천주교 탄압과 함께 신부 9명을 살해하자 이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불란서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했고, 1871년에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좌초한 미국상선에 대한 선체 방화와 선원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함대가 침공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많은 역사적 사실 중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는 계기가 된 강화도조약이다. 1876년 고종 18년에 일본과 체결된 강화도조약은 한·일 수호조약이라고도 불리는데, 조선과 일본 사이에 종래의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통문관계(通文關係)가 파괴되고, 국제법적인 토대 위에서 외교관계를 성립한 최초의 조약이다.
일본의 조선반도 침략 야욕이 구체화된 운양호(雲揚號) 사건 후 체결된 강화도조약은 비록 일본의 강압 아래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기는 하지만, 조선으로서는 쇄국에서 나라의 문을 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라에 힘이 없어 강압적이고 비극적이며 타의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긴 하지만, 다른 세상과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특별하다.
당시 일본은 미국에서 건조한 군함 운양호를 조선으로 보내 침략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첫번째 목표는 강화도. 운양호는 함장 이노우에의 지휘하에 함경도 영흥만까지 북상하였다가 영일만을 거쳐서 나가사키로 귀항한 후 1875년 8월, 다시 일본을 출발하여 서해안을 측량하는 체하며 곧장 강화도로 접근을 시도했다.
운양호는 계획대로 예정된 뱃길을 따라 1875년 8월 21일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 부근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는 식수를 찾는다면서 보트를 내리고 이노우에 함장 이하 수십명이 탑승한 다음, 임의대로 연안을 탐색하며 초지진 포대에까지 접근했다.
운양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조선의 수병들은 여러차례 손짓발짓을 해대며 접근하지 말 것을 알렸지만 일본병사들이 듣지 않자 조선 수병은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계략에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한강 어귀의 요새로, 병인·신미 두 차례의 난에 쓰라린 고통을 체험한 당시의 수비병이 예고없이 침입해 온 외국 군함에 대한 포격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정거리도 짧고 사람의 돌팔매보다도 정확성이 떨어지는 포탄은 보트를 한참 빗나가고 말았다.
조선 수병의 포격이 있자 운양호는 기다렸다는 듯 함포로 포격을 가하여 초지진을 한 순간에 초토화시켜버렸다. 이어 운양호는 뱃머리를 돌려 영종진의 포대에도 맹포격을 가하였다. 영종진 포대에서도 포격을 감행했지만 운양호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다. 영종진의 포대가 초토화되자 운양호는 그들의 육전대를 상륙시켜 방화와 살육, 약탈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조선 수군이 보유하고 있던 포는 구경 12미리에 사정거리 700m를 넘지 못했다. 또 병사와 포술도 화승총을 다루는 정도였고, 명중률 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운양호의 함재포는 110근과 40근의 신예 무기로서 명중률이 높아 전투 결과를 비교할 수 조차 없었다. 운양호의 포격과 육전대 상륙에 의해서 조선 수병 35명이 전사했고, 16명이 포로가 되었다. 대포 36문과 화승총 130여 정 등 많은 무기와 장비를 약탈당했다. 운양호의 피해는 경상자 2명뿐이었다.
일본은 이어 제 2단계 계략을 추진했다. 거함과 대포를 이끌고 조선의 쇄국주의 장벽을 향해 프랑스, 미국 등 서양인들보다 더 용의주도하게 접근했다. 불교와 유교를 중심으로 한 동방문화에 있어 언제나 배우며 수세기씩 뒤처져 추종해 오기에도 바쁜 일본이었지만, 서양의 근대 자본주의 문명을 수입하고 소화하여 갖춘 새로운 힘으로 그동안 우월감에 젖어있던 조선을 유린했다. 조선은 일본의 그 힘에 오로지 전율하고 당황할 뿐이었다.
일본의 무력시위 아래 1876년 체결된 강화도조약은 모두 12개조로 되어 있다. 철저하게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세력을 조선에 침투시키려는 의도로 일관되어 있다.
조선을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여 청(淸)나라의 종주권을 배격함으로써 청나라의 간섭없이 조선에 대한 침략을 자행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고, 부산과 그 밖의 2개 항구를 개항할 것을 규정했다. 그것도 일본이 요청하는 항구였다. 개항장 내에 조계를 설정하고 그곳의 일본인들에게 치외법권을 인정했다. 조선의 주변 바다와 섬을 자유로이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불평등 조약의 표본이기도 한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서양 여러나라와 통상을 시작하게 되고,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서양의 신문명을 수입하는 반면,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바로 강화도에서 일어난 일이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접점으로 게이트웨이 역할을 수행한 강화도는 지정학적인 측면과 유물에서 정보통신적인 요소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지점이며, 하늘과 통신하기 위해 제사를 드렸던 마리산 정상은 기(氣) 측정결과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기가 강한 곳으로 나타났다. 기는 정보통신의 기본이 되는 에너지로, 예사롭지 않은 현상이다.
또한 고인돌도 예사롭지 않은 유물이다. 그 시대 강화도에 분명히 존재했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인돌의 모양도 흥미롭다. 고인돌은 여러 형태가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것이 양쪽에 지지석을 놓고 그 위에 상판 돌을 올려놓는 방식으로, 그 형태가 통신용 안테나를 닮았다.
수 천년 들고 나는 바닷물에 겹겹이 쌓인 염하(鹽河)의 뻘처럼 역사의 흔적은 말이 없지만, 정보통신적인 유물이 많은 강화도는 조그만 관심으로도 역사와 대화를 나누고 통신을 수행할 수 있는 즐거움과 함께 또다른 안타까움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