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정보 분야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 70년대까지는 병원정보라고 했다. 대용량 자료 처리시스템으로 보험청구처리가 전산화의 주요 관심사였다. 전산기를 사용해 인건비를 줄일 수 있다는 직접적 이유 때문이다. 정보기술(IT) 역량이 증대되면서 기술 적용 대상은 보다 확대돼 지식까지 담을 수 있게 됐다. 의료정보도 이런 시대적 추세와 궤를 같이한다면 핵심분야는 지식과 관련된 곳에 있다. 의과학 지식이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는 서비스 현장에 IT가 투입돼야 한다.
바로 전자의무기록시스템(EMR)을 구축하는 일이다. 첨단 IT를 염두에 두고 있는 우리들이 희망하는 EMR는 단순히 의무기록을 그대로 전산화하는 것이 아니다. 진료현장의 시스템적 요구 그리고 방대하고 다양한 정보 처리·의사결정지원 등 시스템 구축에 따른 영향은 상당히 개혁적이며 근본적일 수 있다.
진료 정보를 얼마나 수월하게 시스템에 담느냐의 문제는 가장 오랜 숙제다. 의무기록에서 사용하는 정보는 종류도 다양하며 양도 방대하다. 쉽게 정형화할 수 없을 뿐더러 정형화한다고 해도 그런 체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 최근에 미국에선 XML과 연동되는 데이터베이스를 사용, 어느 정도 체계화했으나 만족스럽다고 할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환자 진료의 시간을 단축해야 하는 현장의 요구에 충실히 대응하자면 정보 입력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돼야 할 과제다. 입력 내용을 구조화하고 입력 내용을 분류체계화해서 입력의 용이성을 높이는 방법도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외국의 경우 몇몇 성공사례가 있으나 국내의 사례는 없다.
음성 인식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내용을 자연어로 변환한 후 일정한 형식에 의거해 데이터베이스로 옮길 수 있다면 EMR의 미래는 열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음성인식 시스템을 적용할 수 있는 영역은 제한적이며 극히 초보적 활용에 그치고 있다. 자연어 변환처리를 위한 형식, 이를테면 개념그래프 그리고 이들 그래프를 도출하기 위한 디지털 의과학 용어체계의 구축 등의 문제가 남아 있다.
EMR에서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숙제는 의료인들의 지능에 기여하는 방법을 찾는 데 있다. 즉 시스템에 지능을 담는 문제다. 물론 전문가시스템 수준의 지능이면 좋다. 그 수준이 못되더라도 각종 경고메시지·임상지침·임상사례 등을 제시, 의료인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작게는 진료정보를 다양하게 처리, 표현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의료 분야는 내용이 다양하고 사용자의 지식 수준도 상이하고 분야도 넓기 때문에 이런 시스템을 하나로 체계화하자면 쉬운 일이 아니다.
지식 사용의 목적은 서로 다르지만 이들 지식을 하나의 지식체계 내에서 이들 지식을 담을 수 있다면 응용시스템에 표현되는 시스템은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취지에서 ‘디지털 의과학용어(지식) 체계’의 구축은 절실하다. 미국의 UMLS와 SNOMED 그리고 유럽에선 READ와 GALEN 등은 지난 수십년간 노력의 결과다. 이런 분류체계 혹은 지식체계를 바탕으로 나름대로 EMR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시스템이 우리나라에 없다면 사오면 된다고 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의과학 지식이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의료현장은 다른 나라와 크게 다르다. 현장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물론 서비스 관행도 상이하다. 지식체계가 우리의 현장에 적용돼야 한다면 우리 나름의 지식체계를 갖춰야 한다. 의과학 지식을 의료인의 머리에 담는 작업은 지난 수십년간 교육에 있어 왔다. 그러나 의과학 지식을 컴퓨터에 담는 작업은 전무한 형편이다. 컴퓨터에 의과학 지식 시스템을 담을 수 없다면 EMR의 구축은 요원하다. 지식을 체계화하는 작업은 멀고 험한 길일 수 있으나 결국 가야 할 길이다. 다행히 다른 나라에서 수행한 작업 내용들 모두가 접근가능하며, 우리나라 의료정보 기술도 상당 수준에 이르렀기에 충분히 희망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