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경쟁력이다>(11)학교편-1.디지털시대 `아날로그 대학 커리큘럼`

 올해 내로라하는 명문 대학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A군은 취업의 기쁨도 잠시 최근 IT 전문 사설학원을 알아보고 있다. 대학에서 배운 교과과정으로는 도저히 기업이 요구하는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업에서는 명문대학을 졸업했다고 ‘준 엔지니어’로 프로그램 개발과 응용을 요구했지만 이를 뒤쫓아갈 수 없어 결국 학원등록을 결심한 것이다. 학교 생활도 열심히 했고,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A군은 기업과 학교의 벽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며 심한 자괴감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기업에서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정작 대학 졸업생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한 마디로 쓸 만한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대학 4년, 대학원 2년을 졸업하고도 기업에서는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학교가 인재양성의 산실이기보다는 졸업장을 위한 고급인력 양성소로 변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대학교육 문제의 핵심은 커리큘럼으로 귀결된다.

 “3학년 1학기까지 기초 필수과목 이수하기에 급급하다. 4학년이 돼서야 비로서 세부 전공에 들어가지만 이 역시도 대학원 진학을 전제로 한 부분적인 전공 이수 성격이 강하다.”(서울대 전자컴퓨터공학과 4학년 A군) “매년 거의 동일한 커리큘럼 구성을 보면서 시대흐름에 뒤처지고 있다는 자괴감에 빠진다.”(KAIST 전자전산학과 2학년 B양)

 학생들의 하소연을 듣지 않더라도 뒤떨어진 커리큘럼의 문제는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커리큘럼의 문제는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실습위주의 교육이 절대 부족하다. 두번째로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지금의 기술이나 시장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는 커리큘럼의 전문성이 결여됐다는 점이다.

 본보가 서울대·KAIST 등 주요 대학의 IT 관련 커리큘럼을 조사한 결과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커리큘럼이 큰 변화가 없었다. 표참조

 서울대 전기공학부의 전공이수과목은 지난 89년과 93년의 1· 2· 3학년 커리큘럼이 한 과목을 제외하곤 그대로였다. 4학년 커리큘럼에서 겨우 신기술을 공부하는 ‘세미나 1·2과정’과 ’마이크로프로세서 응용’이 신설됐을 뿐이다. 지난해 커리큘럼 역시 3, 4개 과목을 제외하고는 89, 93년도와 똑같다. 사학 명문대 역시 마찬가지다.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의 93년과 지난해 학부 커리큘럼에서는 ‘지능시스템 개론’ ‘컴퓨터네트워크’ 등 총 6과목이 신설됐을 뿐 학부제 이후 유사 과목이 통폐합된 경우를 제외하곤 변화가 없었다. 취업 후 실전에서 응용할 수 있는 실습교육도 늘지 않았다. 서울대의 경우 학부별로 실험과정을 개설해 놓고 있지만 대부분이 4학년 과정에 몰려 있고 졸업논문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고려대는 전기·전자공학부에서 당초 6학점이었던 필수전공 실험과목이 4학점으로 줄어 학생들이 이론으로 배운 과목을 응용해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축소했다.

  이 같은 상황은 서울대·KAIST뿐 아니라 다른 대학 역시 엇비슷하다. 최근 김진형 KAIST 전산학과 교수 등 정보처리학회 소속 교수 19명이 조사한 ‘대학의 컴퓨터·소프트웨어 교육 강화 방안’이라는 보고서의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다.

 보고서에서는 대학에는 소프트웨어 개발 경험이 있는 교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교수선발제도의 경직성으로 인해 현장 경력자의 채용이 불가능한 실정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 ‘학부제’ 시행으로 졸업 때까지 학생들의 전공을 파악할 수 없어 프로젝트 지도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컴퓨터·소프트웨어학과 전임교수가 전교생의 교양 전산 과목을 책임져야 하는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또 연간 13만명이 2∼4년제 대학의 컴퓨터와 소프트웨어(SW) 관련 학과에 입학하고 있지만, 정작 대학들은 어떤 인재를 길러내야 할지에 대한 목표 자체부터 흔들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한마디로 대학이 인력양성의 주체지만, 기본원리와 실무적응능력을 갖춘 인재를 사회에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학부제’는 인재양성의 걸림돌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 제도가 도입된 이래 컴퓨터·SW학과의 전공필수 학점은 줄어들었고, 학생들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전공실습 과목을 회피하고 학점 따기 쉬운 과목으로 몰려다니고 있다는 설명이다. 교수들은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학부에서 이들의 세부전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실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컴퓨터·소프트웨어 전공 대학 졸업생의 실무능력이 크게 떨어지고, 취업률 역시 심각한 수준이다. 4년제 IT관련 학과 졸업생의 취업률은 52.7%이고, 취업하더라도 신입사원의 70%는 실제 업무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하는데까지 1년의 시간이 별도로 소요된다. 소프트웨어 강국으로 불리는 인도의 소프트웨어학과 졸업생이 곧바로 미국 실리콘밸리의 기업에 취직하면서 5만달러를 웃도는 연봉을 받는 것과 너무나 대조되는 현상이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

 

◆주요 대학 커리큘럼의 문제

  서울대 전기공학부의 전공 이수 과목을 연도별로 분석한 결과 지난 89년과 93년의 1· 2· 3학년 커리큘럼이 한 과목을 제외하곤 똑같아 5년 동안 커리큘럼의 변화가 없었음이 드러났다. 4학년 커리 큘럼에서 겨우 신기술을 공부하는 ‘세미나 1·2과정’과 ’마이크로프로세서 응용’이 신설됐다. 지난해 커리큘럼 역시 89년, 93년도와 비교해 3,4과목을 제외하곤 동일하다. 2학년까지는 모든 이공학과의 과목이 거의 똑같고 3, 4학년 커리큘럼에 ‘반도체소자’, ‘자료 구조와 알고리듬’, ‘통신기초’, ‘프로그래밍 방법론’ 등이 신설 됐을 뿐이다.

 이는 수많은 기술 변천이 있었던 지난 10년동안 이 대학의 커리큘럼이 기초 학문 중심이란 미명하에 변화를 꾀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사학 명문대에서도 이같은 추세는 마찬가지. 매년 동일한 커리큘럼, 이론 중심의 과목 배치가 신기술 동향과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의 93년과 지난해 학부 커리큘럼에서는 ‘지능시스템 개론’, ‘컴퓨터네트워크’, ‘분산 멀티미디어 컴퓨팅’ 등 총 6과목이 신설됐을 뿐 학부제 이후 유사 과목이 통폐합된 경우를 제외하곤 변화가 없었다.

 취업 후 실전에서 응용할 수 있는 실습 교육도 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 경우 각 학부 별로 실험과정을 개설해 놓고 있지만 대부분이 4학년 과정에 몰려 있고 졸업 논문으로 대체돼 졸업을 위한 형식적 과정이라는 지적이다.

 고려대의 경우 오히려 실험과목이 줄었다. 전기·전자공학부 커리큘럼에서 당초 6학점이었던 필수전공실험과목이 4학점으로 줄어 학생들이 이론으로 배운 과목을 응용해 실험할 수 있는 기회가 축소됐다. 이 학교는 또 실험 실습 시간 외에 실험실을 폐쇄해 자율 실험 학습 기회 마저 봉쇄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대 전자컴퓨터공학과 장준근 교수는 "현 이공계 커리큘럼에는 분명 모순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연구 중심 대학이 취업 중심 대학으로 바뀔 수는 없는 일"이라며 현실적 애로를 토로했다.

 <명승욱 기자 swmay@etnews.co.kr>

 

 ◆인터뷰-김진형 KAIST 전산학과 교수

 "대학 커리큘럼의 전면 재조정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교과 과정으로는 기술 선진국은 커녕 중진국의 문턱도 넘기 힘듭니다. 학교가 변하지 않고는 우수 인재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인재 양성의 첫걸음은 바로 ‘무엇을 배울지’를 알려 주는 커리큘럼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김진형 전산학과 교수는 대학의 교육 방식이 전면 바뀌지 않는 한 ‘인재 한국’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지적은 그간의 연구 성과에서 나온 지극히 당연한 주장이다.

 김진형 교수는 정보처리학회 소속 교수 19명과 공동으로 정통부의 위탁을 받아 ‘대학의 컴퓨터·소프트웨어 교육 강화 방안’이라는 주제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국내 대학이 불분명한 교육 목표, 백화점 식 커리큘럼과 같은 문제로 ‘고급 실업자’만 양산하고 있다고 현 대학 교육의 모습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제는 대학생 수를 늘리기 위한 ‘양’ 위주의 교육 보다는 수준을 높이기 위한 ‘질’교육이 이뤄져야 합니다. 기업이나 사회에서 원하는 것은 졸업장이 아닌 말 그대로 인재입니다. 짜임새 있는 커리큘럼 없이 인재 양성은 불가능합니다. "

 김 교수는 이론과 강의 위주의 커리큘럼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변변한 실습 한 번 없이 4년 동안 허송세월을 보낸 학생이 기업체에서 핵심 연구 인력으로 활동하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설명이다.

 "전산학이나 소프트웨어 분야을 전공한 학생이 졸업 후에도 프로그램 하나 짜지 못하고, 기업 취직을 위해 사설 학원을 찾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실습 위주의 커리큘럼, 현재의 기술이나 트랜드를 뒤쫓아 갈 수 있는 현실성 있는 커리큘럼, 전공 분야 별로 보다 전문화된 커리큘럼이 필요합니다."

  김 교수는 또 커리큘럼의 전문화 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컴퓨터·소프트웨어 분야는 시스템통합(SI)· 멀티미디어·임베디드 소프트웨어(SW)·SW 프로그램·리서치·전자상거래와 네트워크 운영 등 6개 분야로 세분할 것을 권고했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