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일본 메이저 전자업체 중 소니를 제외한 모든 업체가 총 수십조원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했다는 외신보도 이후 흔들리고 있는 전자왕국 일본이 과연 재기할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동안 일본을 벤치마킹하면서 성장해온 국내 전자업계가 바라보는 일본의 미래는 결코 낙관적이지 않지만 저력이 대단해 결코 비관적이지도 않다.
삼성전자·LG전자 등 국내 메이저업계는 일본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첫째가 일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이기태 사장은 “과거와 달리 일본의 젊은이들이 산업현장에서 일하기를 기피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산업계의 중추세력이 갈수록 노령화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일본의 이같은 속사정은 어쩔 수 없이 공장의 해외이전을 가속화시켰고 ‘메이드 인 재팬’의 명성을 퇴색시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 고위 관계자들은 특히 일본의 글로벌화는 마케팅 차원의 필요성에서보다는 내부 노동시장의 경색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LG전자의 신기섭 부사장은 “노동인구의 노령화는 결정적으로 일본산업계의 스피드를 떨어뜨렸다”며 “이 스피드 부족이 IT에 기반한 신산업 육성에 실패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벤처열풍 이후 갈수록 노동인구가 젊어지고 있고 핵심기술에서는 좀 떨어지지만 젊은층의 속도 빠른 응용능력이 이동전화단말기산업을 키워낸 가장 큰 요인이었다며 일본의 스피드 부족을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두 사람은 오늘의 일본이 막대한 자금위기를 겪고 있는 것은 막무가내식 해외공장 이전으로 제품의 품질이 떨어졌고 산업공동화마저 초래됐으나 미국과 달리 수익성 있는 새로운 대체산업 육성에 실패했기 때문으로 이해하고 있다.
둘째가 시장구조가 메이커주도형에서 소비자주도형으로 전환된 점이다.
신 부사장은 “일본 전자산업의 성장의 뒤에는 항상 메이커를 신봉하는 소비자가 있었다”고 말했다. 아키하바라로 대변되는 일본의 전자시장은 항상 어떤 종류의 신제품이든 구입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마니아가 선도해왔다. 그러나 이 마니아는 메이커가 만들어내는 신제품이라면 무조건 환성을 지르는 소비형태를 줄곧 유지, 사실은 메이커가 시장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터넷붐으로 네티즌의 지나친 여론몰이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데서 알수 있듯이 한국사람처럼 까다로운 소비자도 없다”며 “한국소비자의 까다로운 행태가 메이커로 하여금 소비자위주의 경영체질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고 말했다. 일본업계는 아직까지도 공급자 입장에서 제품을 개발하고 있는 경향이 강해 소비자주도형 시장에서 점차 입지를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셋째가 전통적인 안마당지키기 정책이다.
삼성전자 김운섭 전무는 “일본의 통신산업 성장에 결정적인 실패요인을 꼽는다면 독자적인 PHS 방식 고수전략이었다”고 말했다. 세계 통신산업이 GSM 방식과 CDMA 방식으로 나뉘어 혼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독자적인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세계시장 편입기회를 상실했으며 이점이 일본이 통신의 메인스트림에서 밀려난 근본 원인이 아니겠느냐는 지적이다. 한국이 통신산업의 강자로 부상한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안방을 활짝 열어 제치고 주류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던 과단성과 용기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국내업계 관계자들은 그러나 일본의 저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신기섭 부사장은 “마쓰시타를 비롯해 일본의 메이저들이 최근 통신산업 구조개편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고 전제하고 “핵심기술과 핵심부품에서 여전히 최강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이 대대적인 구조개편을 통해 새출발을 다짐하고 있다는 점은 일본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만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유성호기자 shy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