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50)강화도(Ⅲ)

‘매키’ 해군중위

 1844년 4월 23일 출생, 1871년 6월 11일 사망.

 미 해군 아시아 함대의 장교로서 한국 강화도 전투에서 전사.

 미국 아나폴리스에 자리한 미 해군사관학교 교회에 놓여진 추념(追念)패의 내용이다. 1871년, 미국의 젊은장교는 당시 무슨 일로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에 왔을까. 무슨 사유로 강화도에서 전투를 벌였고, 또 어떻게 죽어갔을까.

 당시 강화도에서는 조선군과 미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신미양요(辛未洋擾)라고 기록했다. 1866년,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건방을 떨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화공으로 불태워 버리고 선원 24명을 몰살시킨 사건을 빌미로 미국 아시아함대가 출동하면서 신미양요는 시작되었다.

 조선원정을 명령받은 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1871년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 항구를 출발했다. 19일 남양만에 도착한 후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하여 물치도에 정박했다.

 이어 미 함대는 조선정부에 뱃길탐사를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강화도 해협으로 들어섰지만, 조선정부에서는 불법 영해침범으로 간주하고 광성보 손돌목을 지나는 미 함대에 포격을 가했다. 조선의 대포는 고정되어 있어서 거리와 방향을 조준하기가 어려웠다. 발사된 후에도 폭발하지 않는 쇳덩어리 포탄이었다. 그러나 미 함대는 이를 빌미로 삼아 조선정부에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강화도 상륙작전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6월 10일 오후 1시. 미 함대 ‘모노캐시호’가 먼저 발포를 시작했다. 목표는 초지진 포대. 포격에 놀란 수비대는 곧바로 흩어졌고, 미 함대는 킴벌리 해군 중령의 지휘하에 상륙을 감행했다. 조선군의 저항은 없었다. 하지만 상륙정에서 해변으로 내린 미군들은 뜻밖의 적을 만났다. 갯벌 밭이었다. 허리까지 빠지는 갯벌 속을 헤치며 박격포를 메고 상륙하면서 상당수가 군화를 뻘 속에 빠트렸고, 군복도 엉망진창이 되었다.

 조선군이 버리고 간 초지진의 대포와 토성을 닥치는 대로 때려부순 미군은 부근에서 천막을 치고 야영을 시작했다. 밤이 깊어 자정쯤 되었을 때 조선군이 기습을 감행했다. 북소리와 함께 고함을 지르며 접근해 왔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미군은 놀라 허둥댔지만 박격포 한 발에 조선군의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잠잠해졌다.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무기는 미국 남북전쟁 때 사용했던 최신식 대포와 소총이었다.

 6월 11일. 미군은 새벽부터 해변을 따라 덕진진으로 진격했다. 함대에서는 함포로, 육상에서는 야포로 포격을 가했다. 수륙양면에서 협공을 당한 조선군은 대포 한방 쏘아보지 못하고 흩어져버렸다. 덕진진에는 60문의 대포가 있었고, 대포마다 포탄이 장전되어 있었지만 짙은 안개로 도화선에 불이 붙지 않아 한발도 발사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 함대의 다음목표는 광성보(廣城堡). 해발 45m의 언덕마루에 자리잡은 광성보는 강화도 전군을 지휘하는 사령부가 있는 곳이었다. 대포 143문이 배치되어 있었고, 조선의 정예부대로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호랑이 사냥꾼 2000명 이상이 수비하고 있었다. 치열한 포격전이 있었으나 함포 사격과 야포, 상륙군의 박격포 사격에 광성보 수비대는 곧 무너져 버렸다. 이어 미군의 소총부대가 돌격명령에 따라 성벽을 기어올랐다.

 그때 숨어있던 조선군이 칼과 창을 빼어들고 성벽 위로 나타났다. 소름이 끼치는 괴성을 지르며 성벽을 기어오르는 미군을 향해 돌을 굴렸다. 그러나 미군들도 용감했다. 제일 선두의 장교 하나가 날쌔게 성안으로 돌진했지만 그는 즉시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쓰러진 그의 몸에 깊숙이 창이 꽂혔다. 이 용감한 장교가 ‘매키’ 해군중위였다. 미 해군사관학교 교회에 추념패가 세워져 있는 바로 그 인물이다.

 이윽고 성안에서는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소총 개머리판과 창, 단검과 장검의 결사적인 대결이었다. 조선군은 방탄복으로 아홉 겹 솜옷을 입고 있었다. 총알이 뚫고 들어오지 못했을지라도 몸이 둔해져 백병전에서는 매우 불리했다. 칼과 창 또한 강철로 만든 미군의 단검과 부딪히면 곧 휘어져버려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조선군은 용감하게 저항했다. 항복 같은 것은 아예 상상도 하지 않았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던졌고, 미군의 팔뚝을 물어뜯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바다로 투신해버렸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조선군 사령관 어재연도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하오 2시 45분. 미군이 조선의 황기를 꺾고 37개의 별이 새겨져 있는 성조기를 게양함으로써 치열했던 광성보 전투는 막을 내렸다. 그 후 미 함대는 3주일 동안 더 강화만에 머무르면서 파손된 군함을 수리하고 조선정부에 지속적으로 통상을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철수해야 했다.

 신미양요도 문을 굳게 닫고 있던 조선을 새로운 문명의 네트워크에 포함시키기 위한 외부적 충격이었다. 정보통신이 보편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국민들의 공포는 가름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며, 아홉겹 솜옷을 입은 조선사람과 노란 머리의 미국군인들은 서로에게 괴물처럼 여겼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도 조선과 미국 함대사이에는 상호 대화를 위한 통신매체를 활용했다. 바로 장대를 이용한 통신이었다.

 당시 활용된 장대를 이용한 통신은 서로의 입장을 글로 적어 상대편이 바라다 보이는 해변에 기다란 장대를 꼽고 그 꼭대기에 매달아 꽂아놓는 방식이었다. 꼽아놓은 편지를 보고 상대편에서 찾아가고, 다시 답장을 장대 꼭대기에다 걸어놓으면 상대가 찾아가는 통신방식으로, 이른바 ‘장대통신’ ‘장대외교’라 불렸다.

 개전 초 광성보 손돌목에서 조선군이 미 함대를 포격한 후 로저스 제독은 ‘평화적 임무를 띠고 강화해협을 탐측하고 있는 함대에 기습공격을 가하는 것은 비인도적이고 야만적 행동이다. 6월 10일까지 전권대표(全權代表)를 파견, 사죄 및 보상을 하라. 만일 이에 불응할 경우 보복조치를 단행할 것이다’는 편지를 장대에 걸었다.

 이에 대해 조선정부는 ‘정식 허가없이 강화해협으로 미국함대가 들어온 것은 영토침략 행위로, 이에 대한 공격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면서 사죄를 거부하는 편지를 ‘장대통신’에 걸었다. 편지의 끝에는 가난한 지방재정에도 불구하고 황소 3마리, 닭 50마리, 계란 1000개를 마련하여 미국함대로 보내려했던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리풍파 원양항해에 노고가 많다. 보잘 것 없는 소품(小品)이지만 귀하에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이 물종(物種)을 보내고자 하니 받아주기 바란다’는 자존과 화해의 의지를 함께 ‘장대통신’에 걸었지만, 미국함대는 조선측의 정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포를 발사했던 것이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하게 용감한 조선군과 전투를 벌여서는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고, 통상조약을 이끌어낼 수도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로저스는, 함대를 철수시키기 전에 ‘장대통신’을 통해 편지를 보냈다. ‘부상당한 포로를 데려가라’는 내용이었다. 조선정부에서는 답장으로 ‘너희들 마음대로 처분해라’는 내용의 편지를 ‘장대통신’에 걸었다.

 현재 전적지로 단장되어 있는 강화도 초지진 앞에는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 함대의 포탄에, 미군의 박격포와 총탄에, 일본의 함포에 번번이 쑥대밭이 되어버렸던 초지진과 그 아픔을 함께한 소나무다. 그 소나무에는 아직도 포탄과 총탄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있다. 역사의 혈흔(血痕)이다.

 아주 먼 옛날의 일이 아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