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삶을 사는 주부가 어느 날 자신의 목소리를 테이프에 녹음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떠난 뒤에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남기고 싶은 말이 무척이나 많았던 것이다. 남편의 건강관리에서 자녀교육, 재테크 요령, 김치찌개를 맛있게 끓이고 난초를 오래 키우는 법 등 온갖 일상의 지혜를 담아둔 녹음테이프가 병실 한구석에 수북이 쌓여 갔다.
시간이 흐른 후 남겨진 가족들은 사례별로 준비된 여러 테이프를 들을 때마다 어머니의 알뜰한 성품을 되새겼고 마치 함께 생활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고 한다.
이처럼 개인의 지식정보가 기록매체(서적, 비디오 등)에 계속해서 저장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인격과 품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단계에 이른다. 수십개의 녹음테이프만 듣고 있어도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지 매우 입체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축적된 개인정보의 양만 충분하다면 죽은 사람의 의식체계도 다시 재현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다.
MIT 인공지능연구소의 창시자 마빈 민스키는 이같은 원리를 이용해 인간의 모든 두뇌정보를 디스켓에 복사한 뒤 새로운 육신(로봇)에 이식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자아, 인격이란 개념은 한 인간이 태어나서 평생동안 습득한 정보의 조합에 불과하며 기계로봇도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다.
따라서 의식체계를 구성하는 두뇌정보만 온전히 ‘백업’ 해두면 본래 육신이 소멸해도 기계몸체를 통해 영원히 자아가 유지된다. 실제로 이런 발상은 기독교 전통이 뿌리깊은 서구에선 윤리적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로봇기술을 이용해 영생을 얻으려는 시도는 특히 종교계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란 비난을 받고 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동안 이와 관련한 윤리적 문제지적에 대해 대체로 수세적인 입장을 취해온 형편이다. 그러나 최근 게놈프로젝트의 완성으로 사람이 여타 동물보다 존엄한 존재라는 명제가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의심받으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조그만 벌레의 유전체도 인간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 이에 따라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무엇인가를 가졌다는 얘기는 난센스며 인간은 그저 복잡한 기계에 불과하다는 급진 로봇과학자들의 반론이 거세지고 있다. 덩달아 생물의 두뇌정보를 로봇 하드디스크에 담아두려는 연구가 곳곳에서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과연 사람의 ‘영혼’에 근접하는 지능과 감성이란 지식체계가 로봇에게 이식된다면 그들을 무엇으로 규정해야 할까. 단지 피부소재(금속)가 단백질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해야 할까.
오래 살고픈 것은 옛부터 인류의 공통된 소망이지만 하드디스크에 담겨진 파일형태로 자아를 유지해야 한다면 정말이지 사양하고 싶다.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