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이 사양산업이라는 명제는 분명 잘못됐다. 전형적인 아날로그형 세탁기, 냉장고, TV는 물론 더 이상의 부가가치가 없는 내리막길 품목이다. 한국보다는 ‘세계의 공장’ 중국이나 동남아국가들의 경쟁력이 나날이 높아진다. 그러나 가전왕국 신화를 일구었던 한국업체들은 디지털기술을 접목, 첨단 가전제품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다. 그 궁극적 지향점에는 홈네트워킹이 있다. 인터넷과 통신이 가전을 만나면 우리가 꿈꾸는 미래 지능형 가정의 모습이 탄생한다. IT산업 최후의 승부처로 불리는 홈네트워크 산업을 긴급 점검한다. 편집자
지난 3월 중순 삼성전자 생활가전총괄 한용외 사장은 “2005년까지 1조원을 투자해 홈네트워크시장을 선점하고 이에 기반한 백색가전 사업으로 2005년 매출 60억달러 이상을 달성,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인터넷 기술발전과 함께 정보통신 산업만이 최선처럼 여겨져 온 가운데 우리나라 최고기업의 가전담당 총수가 천명한 이 계획과 자신감의 배경은 무엇인가. 지난 10여년간, 아니 최근 1∼2년간 급속히 발전한 광대역 통신과 전력선통신(PLC)기술의 발전에 따른 홈네크워크 시장의 성장 잠재력이 숨은 해답이다. 어느 국가든 기본적으로 갖춘 전력선이란 인프라를 이용하는 기술, 이른바 PLC기술에 의한 홈네크워크 확산 가능성이 미래 가전산업의 희망이란 것을 말해 준다.
일반에게 그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우리는 콘센트에 모뎀을 설치해 가전품의 플러그만 꽂으면 초고속정보통신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는 시대에 와 있다. 물론 인터넷화·양방향화 등 가전제품 기능의 지능화가 전제된다. 백색가전 회사의 세계화·일류화 전략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PLC 기술수준은 2∼3년 전까지만 해도 외부에서 가전제품을 단순 제어할 수 있는 데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의 젤라인, 미국의 인텔론사, 이스라엘의 아이트란사 등이 초고속통신용 모뎀을 내놓으면서 상황은 변했다.
가전기기의 지능화가 이뤄진다면 가전제품과 모바일 통신기기간 연계를 통해 모든 가전제품에서 컴퓨팅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가정에선 IP공유기 없이도 여러대의 PC로 동시에 인터넷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또 현 수준에서 약간의 SW 부가기술을 지원하는 것만으로도 다양한 인터넷 가전품, 이를테면 냉장고 안의 내용물을 외부에서 파악할 수 있으며, 나아가 저장물 부족시 인터넷으로 자동 주문하도록 할 수도 있다.
이는 이미 90년대초부터 논의돼 오던 홈오토메이션(HA)의 기본 구상이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1∼2년새 급속한 발전을 보여준 PLC기술이 HA의 발전된 개념, 즉 홈네트워크시장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특히 Mbps급 초고속모뎀의 등장은 인터넷 가전품을 내놓으면서 홈네트워크시장을 노려온 가전업계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초고속통신망 보급률을 자랑한다. 거주자 게이트웨이(R/G)를 이용해 각가정에 연결된 초고속통신망을 전력선과 연계하면 가정에 설치된 모든 인터넷 가전품과 통신기기간 호환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에 따른 자연스런 인터넷 가전시장의 성장, 가입자 포화단계에 있는 인터넷접속제공업체(ISP)들의 합세, 콘텐츠제작자의 참여 가능성까지 본다면 홈네트워크는 기존 통신산업에 버금가는 새로운 미래산업으로 떠오를 것으로 예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러한 가운데 세계 컴퓨터업계의 제왕이라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지난 1∼2년새 ‘e홈(eHOME)’이란 홈네트워크 프로젝트를 시작, 적극 추진하고 있다. 미래는 결국 인터넷가전 기반의 ‘홈네트워크의 시대’란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이재구기자 jk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