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한강, 예성강, 임진강 등 3대 하천 어귀에 위치하여 개경이나 한성으로 통하는 관문이 되고 있다. 때문에 강화도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역사의 소용돌이 때마다 그 중심에 자리하여 늘 긴장상태에 있었고, 유난히 긴 해안선과 바다를 감시하고 방어하기 위한 시설과 통신 네트워크가 필요했던 곳이다.
강화도는 삼국시대에도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의 최대 격전지였던 관미성(강화군 교동도 추정) 전투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 개로왕이 죽고 수도인 한성이 함락되어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만큼 중요한 전투였다. 이때 고구려는 강화도를 혈구(穴口) 혹은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하였다.
그 후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한강유역을 되찾았고, 다시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도 강화도는 전투의 한 가운데 있었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장악함으로써 풍부한 물적자원과 인적자원을 확보하여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이때 강화는 해구군(海口郡) 또는 혈구진(穴口鎭)이라 불렸다.
강화도는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역사의 한 가운데에 놓여있었다. 몽고와의 항쟁을 위한 수도가 되었고, 고려 왕실이 몽고에 굴복하는 것을 반대한 삼별초(三別抄)가 대 몽고항전을 부르짖은 곳이기도 하다.
몽고가 침입해오자 당시 정권을 잡고있던 최우는 개경을 지키면서 항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고려사절요’권16, 고종 19년 6월 7일자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날 최우가 왕에게 속히 강화도로 행차할 것을 청하니 왕이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하였다. 최우가 녹봉을 옮기는 차 100여냥을 빼앗아 가재도구를 강화로 옮기므로 서울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담당관리에게 명령을 내려 날짜를 정해서 서울의 5부 백성을 보내게 하고, 성안에 방을 붙이기를 ‘머뭇거리고 제 때에 출발할 날짜를 지키지 못하는 자는 군법으로 처리하라’ 하였다. 또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백성을 성이나 산성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7월 을유일에 왕이 개경을 출발하여 승천부주에 머무르고 병술일에 강화도의 객관에 들어갔다. 이 때 장맛비가 열흘이나 계속되어 진흙길이 발목까지 빠져 사람과 말이 쓰러져 죽었다. 고관이나 양가의 부녀자들 중에도 맨발로 업고 이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 과부나 홀아비, 고아나 혼자사는 사람으로 갈 곳을 잃고 통곡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당시 최씨정권은 강화도를 지키는 데 힘을 기울여 규모의 부대동원에 의한 전면전을 피하고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는 데 그쳤다. 이러한 소극적인 대책으로 관군의 지원없이 민간인들이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막강한 몽고기병(騎兵)을 민간인이 물리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에 그 피해는 전국적으로 엄청났다. 주거시설과 방어시설을 갖춘 강화도가 몽고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했던 유일한 지역이었다.
또한 강화도의 군사적 소용돌이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1627년 금나라 3만 군사의 침입을 받은 인조는 평복차림으로 강화로 피신하여 100일 동안 머물렀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1636년 청나라 태종이 쳐들어왔을 때는 인조가 미처 강화로 피난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퇴각했는데, 강화도가 청에 무너지고 봉림대군과 빈궁 및 여러 대신이 포로로 잡혀가자 항복하고 말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의 일이다. 이때 강화도는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배도(背都)가 되어 유수(留守)와 경력(經歷)을 갖추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뒤 효종은 인조 때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계획하고 강화도 해안에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광성보, 인화보, 승천보 등 방어시설을 새로 쌓거나 고쳤고, 숙종은 강화도 해안 전역의 돌출부에 큰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작은 톱니바퀴 모양으로 53개의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강화도 전지역을 요새화 하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프랑스와 미국, 일본에 의해 또다시 수난을 당하고 끝내 굴복하고 말았다.
강화는 오랜 세월에 걸친 수난에 대항하면서 상처에 상처, 그 위에 또다른 상처가 얼룩진 슬픈 땅이다. 때문에 섬 주변을 늘 감시하고, 긴급상황을 뭍으로 전달할 수 있는 통신 네트워크가 그 어느 곳보다 간절하게 필요했던 곳이다.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한 통신 네트워크 중 하나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꽃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통신방식인 봉수통신으로, 다른지역에 비해 유난히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항은 1999년부터 2000년까지 강화군과 육사박물관에서 공동으로 수행한 ‘강화도 국방유적’ 발굴보고서의 봉수대에 대한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강화부지’ ‘하권’ ‘강화 남산봉수조’에는 “5봉수, 진강산봉수, 망산봉수, 하음산봉수, 남산봉수는 본부에 소속되어 있다. 전라도 해남 관두에서 출발하여 충청도 당진 기화를 거쳐 바다를 따라 통진 약산에 이르러 들어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강화도를 지나는 봉수대는 조선시대 봉화로 중에서 제5봉수에 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5봉수는 전라도 순천으로부터 시작하여 전라도 각 해안을 거쳐서 충청도 내륙지역을 거치고, 충청도의 해안지역은 간봉으로 연결된 봉수를 말한다. 제5봉수는 경기지역에서 다시 해안을 거치면서 북상, 김포 수안산에서 강화도로 넘어와 대모산, 진강산, 덕산을 거쳐 화개산, 하음산→통진의 남산을 거쳐 김포 남산봉수와 연결되어지고 이후 내륙 봉수로를 거쳐 서울의 목멱산(남산) 봉수대에 이르는 통신 네트워크가 활용되었다.
봉수 각각의 거리는 (김포 수안산)←7.2㎞→대모산봉수←6.8㎞→진강산봉수←7.2㎞→덕산봉수←10.5㎞→교동 화개산봉수←11.1㎞→하음산봉수←7.2㎞→남산봉수←7.8㎞→(김포 남산봉수)였다. 이러한 강화지역 봉수간 평균거리는 9㎞로, 각 봉수 별로 봉수군이 16∼20인이 있었다.
봉수대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하음산 봉수는 현재 하음산 정상에 있는 사다리꼴의 석축이 유적으로 남아있다. 화개산 봉수터는 화개산 정상의 서쪽 봉우리에 방형의 석축으로 그 모습이 일부 남아있고, 덕산 봉수는 석축 연조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있어 강화도의 봉수 중 가장 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 그 외의 봉수들은 위치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은 있지만 형태가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봉수통신과 함께 강화도에서는 대포소리를 이용한 통신 네트워크도 활용되었다. 강화도 소재 말도 요망대, 볼음도 요망대, 어류전 요망대에서 외적의 침범을 포착하게 되면 미리 약정된 신호대로 대포를 발사해 소리를 통해 상황을 보고하는 통신 네트워크였다.
각 섬의 요망대에는 요망장 1인과 대포 2대가 배치되었는데,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포를 쏘아 상황을 다음 단계의 요망대에 전하는 방식으로, 소리를 듣고 군사와 주민들이 상황에 따라 대처할 수 있게 한 통신 네트워크였다.
수많은 외침이 있을 때마다 봉수대 연기 하늘로 피어오르고, 요망대 대포소리 요란하게 울렸을 강화도. 그 연기와 소리에 놀라 허둥대던 당시 민초들의 아픔과 함께, 몽고항쟁을 위해 투쟁하던 삼별초군의 1000여척 함선의 깃발을 휘날리던 그 바람을 천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 강화도.
그 강화도에 올해도 봄꽃이 활짝 피었으리라.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 관장)